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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립병원만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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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립병원만 많을까


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저자

 

고3이 된 아들이 고열을 보인 지 엿새 만에 죽었다. 학급 대표로 이어달리기에 나갈 만큼 건강하고 활기찼던 아이가 며칠 만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2020년 3월, 신천지교회를 중심으로 대구경북에서 코로나19가 퍼지던 때였다. 고열에 시달리던 정유엽은 응급실에 갔으나 들여보내 주지 않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파서 병원 문 앞까지 갔는데도 코로나19 감염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들어가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하는 ‘의료공백’ 상태에 놓인 것이다. 몇 시간 뒤 구토와 호흡곤란이 일어나 다시 병원에 갔으나 역시 바깥에서 서성여야 했고, 겨우 대학병원에 입원했지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구경북에 당시 누적 확진자가 7천 명이었지만, 이 지역에는 병원도 병상도 많았다. 대구 시내 병상만 약 4만 개이고 그중 상당수는 비어 있었으니 병원들이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입원하지 못한 채 기다리는 환자가 천 명’인, 이른바 의료공백이 생겨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병원 대부분이 코로나19 환자를 외면했고 대신에 소수의 공공병원이 진료를 전담해 고군분투했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자 아버지가 길을 나섰다. 옷 위에 커다랗게 “정유엽과 내딛는 공공의료 한걸음”이라 써 붙이고, 경상북도 경산에서 청와대까지 370킬로미터를 도보로 행진하였다. 학원을 운영하는 그는 평소 공공의료에 관심이 없었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이에 관해 눈뜨게 되었다고 했다. 의료공백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억울한 죽음이 다시 없도록, 부족한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하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우리는 사립병원만 많고 공공병원은 드문 현실을 살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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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간 기회, 책임을 면하려는 정부


우리 땅에 서양의학은 19세기 국가에 의해 도입되었다. 쇄국 끝에 개항한 조선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또한 의학을 받아들였다. 1885년에 서양식 의료기관인 국립 제중원을 설립했고 1899년에는 수도 한성에 의학교를 개교했다. 이어 지방 각지에도 관립 의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려 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 곳곳에 국공립 의과대학에서 의사가 양성되고 전국 어디서나 공공병원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나라에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으로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일제가 주요 도시 여러 곳에 자혜의원 등 관립 의료기관을 세우기는 했으나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에 위치한 이 시설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을 위한 의료기관일 뿐이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경성의전, 평양의전, 대구의전 등 관립 의학교에서는 입학 단계부터 조선인을 차별하고 일본인 위주로 학생을 선발해 조선인 의사 배출은 적은 숫자로 억제되었다. 해방과 함께 드디어 우리 손으로 의료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으나 곧이어 벌어진 남북분단과 미군정, 게다가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우리를 좌절케 했다. 의사를 늘리고 공공의료를 강화할 기회는 또다시 사라졌다.


한편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임시정부는 의료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보았다. ‘농인과 공인의 무상의료를 널리 시행함’이 포함된 건국 강령이 이를 증명한다. 삼균주의. 즉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 완전 균등을 선언하는 평등주의를 토대로 한 이 강령에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해 균등 사회를 실현할 방안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계승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의료시설과 의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의료 국영론은 시기상조’라 주장하며(보건후생부 초대 장관 이용설, 1947) 공공의료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스스로 면하려 했다. 이 논리는 ‘민간이 종합병원을 많이 설립하고 미국의 보건행정을 배울 것’이라며 미국 정책을 추종하는 빌미로도 이용되었다. 이른바 자유방임 의료제도의 시작, 시장에 의료를 맡기는 정책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어언 75년이 지났으나 정부의 책임 외면, 과도한 미국 편향에는 달라진 게 없다. 의료보험을 도입할 때도, 부실한 보험을 보완할 때도, 건강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자기 역할을 보험료 징수와 재정 관리에 한정할 뿐 의료 공급에는 소극적인 역할에만 머물렀다. 공공의료를 확대해야 할 시점에 정부가 선택한 것은 언제나 사립병원의 확대, 의료 시장의 팽창이었다. 민간에 저리 융자금, 정책 지원금을 제공해 병원 설립과 확장을 부추겼고 진료에 비급여 항목을 허용해 건강보험의 통제 밖에서 ‘돈이 되는 진료’가 가능하게 했다. 병원이 전공의를 고용해 수련을 명목으로 장시간 노동하게 하는 것도 용인해 경영 이익을 높여 주었다. 그 결과 사립병원이 한없이 많아지고 규모도 커졌다. 지금 전국 병상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데 이르렀으니 사립병원은 그야말로 의료계의 주류이며 시장의 지배 세력이다.


일부 사립병원, 특히 대규모 시설을 갖추게 된 병원들은 ‘단순히 병원’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대학병원의 자리에 올랐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 무엇이든 속내는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있다. 대학병원이 되면 전문의 고용이 훨씬 쉬워져 타 병원과 경쟁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제 전국 40개 의과대학 중 절대다수인 30개가 사립이다. 정부가 자유방임을 내세워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학문과 교육까지 시장이 접수했다.

 

 

공공이 소유하는 병원이어야
“소유냐, 기능이냐.” 2008년 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정부 회의장에서 숱하게 듣던 말이다. 공공의료 강화 정책을 못마땅히 여기는, 그 정책을 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를 비난하는, 대개는 사립병원에 소속된 사람들이 주로 그 말을 꺼냈다. 병원에 중요한 건 ‘소유 주체가 누군지’가 아니라며, 다시 말해 공공병원이냐 사립병원이냐를 구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대신에 ‘기능으로 평가
(하여 정부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내놓던 말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해마다 예산은 전년도에 정해지는 것이라 2월에 정권이 바뀌었어도 참여정부가 짜 놓은 대로 써야 했는데, 2008년 예산에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지방 대학병원 지원금이 있었다. 종부세로 걷은 돈을 활용한 유례없이 큰 액수였다. 참여정부였다면 당연히 지방 국립대병원 중에 몇 곳을 선발 지원해 공공의료 강화를 추진했을 테지만, 시장만능주의를 내세우며 당선된 새 대통령은 생각이 다른 듯했고 사립대병원들도 그걸 간파하고 있었다. 그 병원들 눈에 그 돈은 규모를 키울 기회, 시장에서 자기 지위를 높일 도약의 발판이었다.


“소유 주체를 따지지 마라. 민간인 우리도 공공성에서 못지않다.” 지역별 선발 대상에 국립대병원뿐 아니라 자기들 사립대병원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정권의 윗선도 이에 동조하니 공무원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공공의료 강화의 목표쯤이야 종잇조각 정도로 여기는 처사였지만, 예산 책정의 취지에도 맞지 않았지만, 비판은 무시되었다. 지역마다 병원끼리 치열한 선발 경쟁이 벌어졌다.


지나간 일이 새삼 떠오른 것은 정유엽의 죽음 때문이다. 유난히 치열했던 그 지역의 내부 경쟁, 무책임한 뒷말 등으로 어지러웠던 기억이다. 당시 정부 산하기관에서 일했던 나는 선발 실무를 맡아 경쟁에 나선 병원을 전부 방문했는데, 어느 병원에서든 자신들이 환자에게 최고의 의료를 시행하며 취약계층 보호와 지역 공익을 위한 열정에 남다르다고 설명하기 바빴다. 사립병원들이 특히 빼놓지 않는 것은 공공을 위한 자신들의 헌신이 공공병원에 못지않다는 주장이었다. 이제 십수 년이 흘러 병원들은 더 커지고 더 첨단의 시설을 갖추게 된 듯한데, 그 한가운데서 정유엽은 의료공백 상태에 방치되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병원들이 말했던 공익을 위한 열정, 공공을 위한 헌신은 어디로 갔을까.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가 선택한 글귀는 ‘공공병원 확충’이다. 의료기관의 ‘소유 주체가 누군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공이 소유하는 병원이 필요하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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