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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에 큰 관심, 불평등에는 무관심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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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 이야기

 

민영화에 큰 관심, 불평등에는 무관심


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저자

 

의료 공공성의 빈약함. 이는 우리 사회의 큰 허점이고 시급한 숙제다. 기후 위기와 함께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대유행이 앞으로도 이어질 테니 새 대통령이 누가 되든 의료 공공성을 높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 관점에서 대선 후보의 공약을 보면 단연 돋보이는 쪽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다. 노동에 이어 의료를 두 번째 핵심 공약에 올렸고 진료 부담금 상한제, 주치의 제도, 공공병원 확보, 원스톱 산재보험, 상병수당 등 공공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방안을 두루 담았다. 좋은 공약이 널리 알려지기를, 좋은 공약을 낸 후보에게 다수의 지지가 있기를 바란다.

양강을 이루는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의료 공약은 범위가 다소 좁다. 지역별 중증질환 치료 병원의 확보와 인력 확충을 위한 국립의대 신설(이재명), 중증 환자 병상과 의료 인력의 미리 확보(윤석열) 등이다. 언뜻 양쪽이 비슷한 듯 보이지만, 맥락은 전혀 다르다.

이재명 후보는 전국에 ‘70개 중진료권별’ 공공병원을 확보하고 ‘지역’ 병원을 신·증축하며 의대를 신설해 인력을 확보하고 지역의사제, 지역간호사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의료의 지역 배분이 개선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치우치지 않고 전국 고루 병원과 인력을 확보한다면 감염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동시에 지역 간 의료 불평등도 줄일 수 있다. 누구나 어디서나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공공성이 높아진다.

윤석열 후보는 ‘필수의료 국가책임제’를 도입해 음압병실, 중환자실, 응급실에 필요한 ‘비용’을 공공정책 수가로 지급하겠다고 한다. 중증 의료시설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실행 방안으로는 공공병원을 늘리는 게 아니라 사립병원에 돈을 더 지급해 시설을 확보하겠다는 것으로, 공공성이 아닌 시장 의존성을 더하게 할 공약이다. 게다가 시설들을 지역별로 고루 설치하는 데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어 지역 간 의료 불평등을 방치하고 더 커지게 할 것이 우려된다.

 

서울을 여섯 개 합친 넓이가 생활권이라니

우리나라에 병원*이 많으나 주로 도시에, 그중에서도 대도시에 치우쳐 있다. 농어촌에는 응급과 분만에 이용할 병원이 없고 간단한 입원이나 수술도 할 데가 없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의료를 시장과 사립병원에 맡겨 둔 결과다.

지난 가을, 대통령 후보를 정하려고 정당마다 경선이 한창일 때, 초선으로 정치 경험이 짧은 국회의원이 보수 정당의 경선에 출마해 눈길을 끌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대통령이 되겠다며 포부를 밝히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공공의료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특히 공공병원 신·증설에 목청 높여 반대하던 연구자 출신이다.

몇 해 전 그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려고 발표한 연구 보고서가 희한했다. 일정한 지역에서 인접한 시군으로 향하는 통행량을 측정해 도착지로서 비중이 3퍼센트 이상인 범위를 ‘생활권’이라 정하고, 이 범위 안 왕래는 ‘출퇴근이나 장보기 등 생활 측면으로 볼 수 있어’ 타지 이동이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설사 병원이 없는 지역이라 해도 주민이 ‘생활권’ 안에서 병원을 이용할 수 있으면 그곳을 의료취약지역이라 여길 이유가 없다면서, 이렇게 분석할 때 우리나라 땅에는 의료취약지가 불과 몇 군데 되지 않아 공공병원 신·증설이 타당하지 않다는 게 결론이다.

그 연구에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던 것은 분석 결과로 내놓은 생활권의 범위였다. 전라북도를 예로 들었는데 도내 14개 시군 중 6개를 합친, 다시 말해 서울시를 여섯 개 합친 넓이에 해당하는 면적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놓았다. 그 경계 안 왕래가 총 통행량 중 3퍼센트를 넘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처럼 넓은 면적을 생활권이라, 그곳에서 왕래는 내부 이동일 뿐 ‘타지 이동이 아니’라는 데에는 어이가 없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 은평구 주민이 송파구 아산병원에 진료받으러 간다고 하면, 또는 강서구 주민이 노원구 상계백병원에 간다고 하면, 먼 길을 가니 고생이 많다고 안쓰럽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곱절로 멀리 가야 병원에 닿는 농어촌 주민에게는 ‘통계적으로 보아 생활권 내부 왕래’라며 대수로운 거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평등에 대한 합리화이고 연구를 빙자한 오만에 가깝다.
오히려 그의 연구 결과는 공공병원 신·증설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드러내 주었다. 시군을 넘나드는 긴 통행이 일상적이라는 사실은 지역별 자원이 얼마나 부족한지, 농어촌 주민이 일상의 필요를 해소하는 데 얼마나 큰 부담을 지고 있는지, 국가가 그동안 국민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보여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민영화에 큰 관심, 불평등에는 무관심

발언권을 크게 갖는 전문가 중에 지역 간 불평등에 무관심한 이가 적지 않다. 특히 시장만능주의가 정책 기조이던 이명박 대통령 시절, 의료 ‘민영화가 선진화’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우리나라에 마치 불평등이 없는 듯이, 또는 무시해도 될 가벼운 문제인 양 말하곤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2년째에 “의료제도 선진화를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내게 맡겨진 공공의료에 관한 발제는 그저 양념이었고 그날 순서의 핵심은 의료 민영화의 대표 논객인 대학교수의 발제였다. 그는 영리병원 허용 등 ‘선진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정부 의지가 부족하고 국민 의식도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탓이라고 했다. 어떤 단체의 대표라 소개된 중년 남성 의사는 ‘언제까지 공공의료 확충에 돈을 쓸 거냐. 비효율적인 공공병원을 놔둘 이유가 뭐냐’라며 불만스러워했다. 마이크를 쥔 거의 모두가 공공의료에 적대적이었고, 세계화와 함께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시대가 왔다며 분권과 자율로 경쟁해야 하고 소비자를 위해 영리병원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에게 현실은 관심 밖이었다. 이미 수익 논리가 넘실대는 의료 현실에서 필수의료 위축, 지역 간 불평등 같은 문제가 산적해 있건만 ‘선진화’를 꿈꾸느라 그런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의료를 돈벌이라고만 여기는 게 아닌지, 국토는 마치 서울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넓힌다고 해 봐야 서울 근처 수도권의 일부 아파트 구역까지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아닌지 싶었다.

의료 민영화를 주장하던 그들 목소리가 윤석열 후보의 공약 행간에 어른거린다. 공약의 골조인 ‘필수의료를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무모한 약속은 대도시에 있는 병원만 유지하면 된다는 편리한 사고방식과 한 짝이다. ‘공공병원이 필요 없다’는 잘못된 판단은 지역 간 의료 불평등을 하찮게 여기는 무책임한 태도와 한 몸이다.

 

공공병원 운영에 드는 돈은 안전 비용

지난 2년간 코로나19 대유행은 국가공동체와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한꺼번에 일깨워 주었다. 어디에 사는 누구든 신속하게 검사받고 적절하게 치료받고 백신을 접종할 수 있어야 우리 모두가 안전하다. 요양원, 정신병원, 군대, 이주노동자 숙소의 상황이 도시 중산층의 안전과 직결된다. 내가 안전하려면 남이 안전해야, 이쪽 동네가 안전하려면 저쪽 동네가 안전해야, 도시가 안전하려면 농어촌이 안전해야 한다. 어디에든 병원이 있어야 하니 공공병원이 필요하다. 이에 드는 돈은 모두를 위한 안전 비용이다.

 

무서운 기세로 코로나19 대유행이 닥치자 민영화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감염병 대응을 민영화하라’ 같은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도 실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공공의료가 중요하다는 것을.


* 큰 병원을 말한다. 우리는 흔희 의사가 진료하는 곳이면 개인의원과 종합병원을 가리지 않고 '병원'이라 부르지만, 의료법에서는 명백히 구분된다. 의원(clinic 또는 office)은 주로 외래진료를 하는 작은 기관이며 병원(hospital)은 입원환자 진료를 위해 30개 이상의 병상과 다수 의료진을 확보한 큰 기관이다. 규모와 내용에 따라 병원, 종합병원 등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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