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읽기

노는 여자라서 죄송합니다

월간 작은책

view : 1447

살아가는 이야기

노는 여자라서 죄송합니다


박현주/ 취집한 맘충 경단녀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맞벌이가 대세인 이 시대에 전업주부가 됨으로써 내가 얻은 명함이 3장 있다.

‘맘충, 취집, 경단녀’.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당연한 듯이 주위 사람들의 배려를 바라는 태도를 보이거나,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그 여자를 ‘맘충’이라 부르며 비난한다. 행동만 탓하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 벌레 ‘충(蟲)’ 자를 붙이고는 인격 자체를 싸잡아 비난한다. 사람더러 벌레라니? 게다가 그 대상이 하필이면 엄마여야 하는가. 식당이나 카페에 애들을 데리고 갈 때 조심한다고는 하지만, 누군가는 유난히 뾰족한 눈으로 나와 아이들을 예의 주시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잠재적 범죄자가 되는 기분이다.

 

‘맘충’에 더하여 요즘은 ‘취집’이란 말이 유행이다. ‘취집’, 여자가 취직 대신 시집을 갔다는 뜻인데, 요즘은 결혼 전 제 몫의 일을 했고 결혼 후 사정이 생기어 일을 그만둔 경우에도 ‘취집’으로 낙인찍는다. 전업주부를 남편에게 더부살이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취급한다. 부부 중 어느 하나가 육아와 가사에 전념할지, 맞벌이할지는 선택의 문제인데 아내가 벌이를 멈추면 남편에게 기생하는 ‘취집녀’로 인식된다. 전업이든 맞벌이든 정답은 없다. 오답도 없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선택할 문제다.

 

전업주부가 된 뒤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명함은 ‘경단녀’이다. 전업주부는 육아와 가사를 맡아 가정의 안녕을 위해 일하지만, 돈을 버는 것은 아니므로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는다. 분명 정신적육체적 돌봄노동을 하는데도 ‘노는 여자’가 된다. 경력이 전환된 건데 ‘경력 단절’ 여성이라 부르며 재교육으로 경력을 이어 나가거나 아예 새로운 직종에 나서길 부추긴다. 집에서 놀지 말란 뜻이다.

 

‘경단녀’로 전락한 나는 취업시장에 떠밀리듯 나갔다. 그러나 세상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일하던 분야의 인력 시장에서 재취업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 뒤, 주부 유망 직종을 검색하고는 여성새일센터를 기웃거렸다. 그곳에서 선망하는 직업과 실제 인력 수요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성새일센터에 구인을 의뢰하는 직업의 종류와 수가 한정적이라 그곳에 오는 여성들의 다양한 구직 욕구를 채울 수 없다. 여성새일센터에서 경단녀는 몇 가지 교육을 받는다. 대개는 정부 지원금을 받는 수업의 수강생으로 활용된다. 교육을 받는다고 취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뭐라도 해 보자고 눈을 낮춰 지원하면, 면접의 기회가 생긴다. 의욕을 보여도 돌아오는 것은 “애들 키우며 이 일 하실 수 있겠어요?”라는 불신의 눈초리다. 안 시킬 거면서 왜 불렀는지, 교통비 한 푼 안 주면서 오라 가라 한 것을 속상해하며 돌아섰다. 아르바이트라도 구하려 시도하면, 이번엔 어설픈 경력과 학력이 발목을 잡는다. 거부 이유는 ‘금방 그만둘 거 같아서’이다.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는 공시에도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결국엔 다시 가사로 복귀했다. 그러나 육아와 가사를 하며 수없이 갈등했다. 완전히 단념할 수 없었다. 경력 단절 여성이기에 그렇다.

 

 

전업주부란 애당초 온전한 사회인일 수 없어, 구직을 희망해야 하는 게 정석처럼 되어 버렸다. 자녀가 영유아기를 지나 육아로 인한 노동 강도가 줄 무렵, 사람들 눈에 주부는 집안일 조금 하고 남편 등골 빼먹는 기생충이 된다. 성인의 노동은 돈을 벌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육아와 가사를 도맡아 남편이 돈벌이에 집중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가정 경제에 이바지하지만, 통장에 찍히는 것은 남편의 소득뿐이다. 남편의 소득 없이는 가계가 곤궁해진다. 평생 일을 해 온 어머니는 내게 “남편 덕에 먹고 사니, 남편에게 잘하라.”라고 당부한다. 어머니조차도 벌이가 없는 딸을 온전한 성인으로 보지 않는다.

 

마흔을 넘긴 지금은 재취업을 포기했다. 결국, 지금 난 남편 덕에 먹고산다. 다시 일할 것을 권하던 사람들에게 무직은 나의 무능 탓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무능해서 노는 여자입니다. 노는 여자라서 죄송합니다.” 체념하고 나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겉보기에 한량이 따로 없으나 태도는 당당하다. 오미크론이 극성인 중에 미국으로 출장 간 남편은 나 아니었으면 누구에게 애들을 맡겼을까. 엄연한 분업이다. 그래도 이따금 누구든 내게 일하라고 하면, “나는 무능해서 노는 여자입니다. 노는 여자라서 죄송합니다.”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취집을 한 맘충 경단녀’가 되고 보니, 비로소 나는 무적 파워레인저라도 된 것 같다. 남 걱정으로 둔갑한 몹쓸 비난과 혐오의 광선을 받으면 나는 ‘취집’으로 찌르기하고 ‘맘충’으로 돌려차기한 뒤에 ‘경단녀’의 빔을 쏘며 맞선다. 이렇듯 뻔뻔함을 쏘아 대도 오지랖 넓은 밧줄로 나를 꼼짝 못 하게 묶으려는 이에게 나는 노는 여자의 해탈한 미소를 날린다. 
“누가 뭐라면 그냥 웃지요.”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자동입력방지 스팸방지를 위해 위쪽에 보이는 보안코드를 입력해주세요.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창닫기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