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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혁명광장에서 만난 메이데이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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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가요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만난 메이데이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2015년 5월 1일 메이데이는 쿠바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맞이하였다. 그해 4월 29일부터 5월 9일까지 참가했던 국제 활동가 연대 캠프 이름이 ‘국제노동절 브리가다’였다. 브리가다 캠프에서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었다. 21개국 190명쯤 되는 브리가다 참가자들이 대형 버스 5대에 나눠 타고 아바나로 떠났다. 카이미토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 국제캠프장(CIJAM)에서 아바나까지 거리는 20킬로미터 정도 된다. 아바나에 들어서자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짙은 안개를 헤치고 혁명광장 쪽으로 가는 행렬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브리가다 참가자들은 행진에 참가하지 않고 바로 호세 마르티 기념탑 앞 지정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호세 마르티 기념탑과 동상. Ⓒ박준성

 

호세 마르티 기념탑 앞 층계는 크게 3단으로 나뉘었다. 맨 꼭대기에는 그때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와 국제노동절을 축하하러 날아온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비롯한 귀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둘째 단에는 쿠바 혁명의 원로들, 세 번째 단에는 브리가다 참가자들을 포함하여 해외에서 참가한 연대자들 700~800명이 자리했다. 모두 사전에 출입증을 받고 검문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오전 7시에 행사가 시작되었다. 혁명광장 밖에 집결했던 노동자와 주민들이 행진해 들어왔다. 참가자 소개에 이어 쿠바 노동조합총연맹(CTC) 위원장이 기조연설을 했다. 라울이나 마두로는 기념식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 말도 안 했다. 다른 누구도 이어서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2008년까지 피델 카스트로는 메이데이 집회에서 몇 차례나 두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연설을 했다고 한다.

 

혁명광장 위 하늘을 가득 채웠던 먹장구름이 천둥소리와 함께 잠시 세찬 폭우를 쏟아부었다. 라울도 마두로도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쫄딱 맞으며 행진이 마무리될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혁명광장 한쪽에 늘어선 합창단과 군악대는 빗소리를 이기기라도 하려는 듯 음악 소리를 높였다. 행진단은 가지가지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광장을 지나갔다. 한바탕 축제와 같았다. 우리도 계단에서 내려가 잠시 신나게 어울렸다. ‘간결 명료’한 행사가 끝나고 십만 가까이 되는 쿠바 노동자들과 인민, 3천여 명의 외국인 참가자들이 서서히 혁명광장을 가로질러 빠져나갔다. 높은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니 행진 자체가 중요한 행사처럼 보였다. 아침 7시에 시작한 행사가 8시 반 무렵에 모두 끝났다. 진행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보려고 느지막이 혁명광장에 갔다가는 대부분 허탕을 치게 마련이다. 메이데이 전날 신나는 전야제 행사도 있고, 당일에는 새벽같이 시작해서 식전에 끝내고 하루 쉬려는 셈이었다. 브리가다 참가자들에게도 하루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캠프에 참가한 뒤 처음으로 아바나 관광을 했다. 

 

혁명광장 한쪽에는 쿠바 독립의 영웅 호세 마르티(1853~1895)의 기념탑과 동상이 서 있다. 맞은편 끄트머리에는 내무부와 통신부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각각의 벽에는 체 게바라(1928~1967)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1959) 얼굴 윤곽을 철제 파이프로 만들어 벽화처럼 붙여 놓았다. 평소에는 광활한 아스팔트 벌판 같은 혁명광장으로 여행객들을 이끄는 유명한 상징물들이다.

 

내무부 건물의 체 게바라. Ⓒ박준성

 

행진 대열 끄트머리가 광장을 모두 빠져나갈 즈음 비가 그쳤다.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 형상 아래 써 놓은 글귀가 또렷이 보였다.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는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와 쿠바 인민에게 남긴 편지에 들어 있는 말이다.

 

“Vamos bien Fidel(잘하고 있어 피델)은 카스트로가 혁명광장에서 연설을 하다가 곁에 있던 카밀로에게 “나 어때?” 하고 묻자 대답한 말이었다. 카스트로의 동상이나 얼굴 조형물은 없으나 보이지 않는 뒤편에 그의 이름이 서려 있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1958년 12월 30일 체 게바라와 함께 산타클라라를 탈환하고 쿠바 혁명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혁명 후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나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아니라 그를 혁명군 총수로 임명하였다. 하층 계급 출신으로 쿠바 인민의 존경을 받았으나 혁명에 성공한 뒤 아홉 달 만에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영영 실종되었다. 27살 나이였다. 

 

통신부 건물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박준성

 

호세 마르티는 쿠바 독립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며 우리의 ‘아리랑’처럼 쿠바를 상징하는 노래인 ‘관타나메라’를 썼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1855~1895)과 비슷한 시간을 살았고 같은 해 죽어 더 관심이 가는 인물이다. 아바나 국제공항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2015년 국제노동절 브리가다 캠프를 마치고 쿠바의 동쪽 산티아고데쿠바까지 자유 여행을 했다. 아바나로 돌아와 호세 마르티 기념탑의 기념관과 꼭대기 전망대에 올라가 보려고 혁명광장에 다시 갔다. 내부 수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2020년 두 번째 쿠바 역사기행 때도 못 들어갔다. 남들이 전망대에서 아바나 사방을 찍은 사진을 보니까 장관이다. 백두산에 간다고 누구나 천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아쉬움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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