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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틴 한, 민주주의 없는 디즈니랜드의 철벽을 두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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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보이지 않는 저항자들

 


커스틴 한, 민주주의 없는 디즈니랜드의 철벽을 두드리다

홍명교/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 활동가.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저자

 


올해로 서른다섯인 커스틴 한(韩俐颖)은 전형적인 싱가포르 화인(華人) 청년이다. 싱가포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가였던 그녀의 부모님은 다행히도 아시아의 전형적 훈육 방식을 추종하지 않았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는 말도, 좋은 직장을 얻어 돈 많이 벌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부딪치고, 스스로 선택하길 원했다.

커스틴의 20대도 필자처럼 방황으로 가득했던 모양이다. 학부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던 그는 저널리즘으로 석사과정을 마치더니, 갑자기 뉴질랜드로 영화 공부를 하러 떠났다. 놀랍게도 뉴질랜드라는 미지의 땅에서 그녀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삶을 맞닥뜨렸다.

 

뉴질랜드 영화산업은 할리우드 CG 작업의 하청 공장이나 다름없다. 그중에서도 <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의 막대한 자본 동원력은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한데 이렇게 수직계열화된 산업구조는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임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커스틴이 체류하던 시기 뉴질랜드에서는 피터 잭슨의 영화 제작 방식을 비판하는 영화 노동자들의 투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이는 결국 <반지의 제왕> 속편이 뉴질랜드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촬영되는 결과를 낳았다. 마치 중국 정저우의 애플 하청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애플이 베트남과 인도의 OEM 공장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생산네트워크를 조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구조는 가치사슬 밑단에 위치한 노동자들의 노동권 문제를 야기했고,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결과였다.

 

커스틴이 나고 자란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도시국가다. 인구 550만 명의 이 도시는 흔히 화려하고, 풍족하며, 발전된 도시로 지칭된다.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싱가포르에 관한 이미지 역시 이와 멀지 않다. 그렇기에 커스틴 역시 ‘탈정치화’를 종용하는 이 도시 안에서 노동이나 일상으로부터의 정치성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SF 소설 《뉴로맨서》로 휴고상을 수상했던 작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1993년 <와이어드>지에 쓴 르포 기사에서 “싱가포르는 사형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라고 쓴 바 있다. 그는 모든 규율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이 도시를 ‘무균 상태’에 비유하면서, 기업화된 정부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고, 질서에 집착하며, 유머와 창의성이 현저히 부족한, “끊임없는 전체관람가 영상”이라고 비판한다.

 

작은 사회 모순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은 더 큰 모순도 볼 수 있다. 커스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싱가포르 역사 속 반공주의적 탄압의 기록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보고 싱가포르의 혹독한 사법제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인구당 사형 건수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다. UN 통계에 따르면, 싱가포르에서 사형 집행이 최고조에 달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5년 동안, 인구 100만 명당 13.83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악명 높은 독재국가 투르크메니스탄에 이어 세계 2위였다. 이처럼 사형 판결과 집행이 빈번한 이유는 강력범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처벌이 매우 광범한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단 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이뤄지면 거의 여지 없이 집행된다. 제도적으로 세 차례에 걸쳐 항소할 기회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형수에 대한 감형이 이루어진 것은 1965년 건국 이래 단 여섯 차례에 불과하다.

 

용부이콩(Yong Vui Kong) 사형 판결 사건은 커스틴이 정치적으로 급진화한 계기였다. 2007년 19살이었던 말레이시아 출신 이주민 용부이콩은 헤로인 47그램을 소지하고 있었단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마약 조직의 보스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용부이콩은 ‘마약오용법(Misuse of Drugs Act)’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법은 15그램 이상의 헤로인을 소지한 사람은 누구든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NGO들의 끈질긴 항의와 진상규명 노력 끝에 용부이콩이 단순 ‘배달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2013년 11월, 용부이콩의 형량은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이 사건 이후 커스틴은 사형제도의 잔혹성을 뼈저리게 인식했고, 싱가포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을 들여다보게 됐다. 실제 싱가포르의 감옥에 구속된 이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빈곤한 가정에서 자랐고,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한 배경을 갖고 있다. 용부이콩 역시 가난한 시골 지역인 말레이시아 사바주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극심한 폭력에 노출된 채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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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틴 한(韩俐颖). 사진_ 커스틴 한 트위터에서 갈무리.

 

커스틴은 사형제 폐지 운동가가 됐다. 그가 속한 ‘변화가능한 정의집단(Transformative Justice Collective)’은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싱가포르 사형제 폐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많은 사형수 수감자들을 지원하고, ‘사형 집행 절차’ 감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녀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구조화된 빈곤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사형제도는 “계획적인 살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2018년 의회에 출석해 ‘온라인 허위사실 방지 및 조작 방지법’ 반대 연설을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싱가포르 국가권력의 압박은 커스틴 같은 활동가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협하고, 일상을 난관에 빠뜨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사형제도 폐지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이 운동은 “사형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있다. 커스틴은 우리에게 절망과 비관에 포획되지 말고, 철벽 무너뜨리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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