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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의대 증원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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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의대 증원이 되려면

김동은/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진료사업국장.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김동은 교수.

 

의대 입학 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의 집단 사직으로 인한 병원의 혼란이 ‘악화일로’다. 수술실 운영을 50퍼센트 이상 축소해 한시가 급한 암 환자 수술까지 연기되고 있다. 교수들이 당직을 서며 응급실,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지만,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19년간 동결된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2035년이 되면 약 1만 5000명의 의사 부족이 예측되어 더는 늦출 수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2년 기준 OECD 국가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3.7명인데 우리나라는 2.1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의사협회는 저출생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가 예상되므로 의사를 늘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필수 의료’, ‘지역 의료’의 공백은 의사 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불균형한 ‘배치의 문제’라며 의대 증원에 반대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의사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어 왔다. 진료 현장에서 의사 부족을 절감했고 의사가 훨씬 많이 필요한 초고령화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 북부 지역에는 중이염, 축농증을 수술하는 병원이 거의 없어 환자들이 2~3시간 거리의 대구까지 오는 불편을 겪고 있다. 전국 250개 시군구 중 108곳(43퍼센트)이 산모가 병원에 1시간 이내 접근하기 어려운 ‘분만 의료 취약지’다. 실제로 서울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3.5명인데 경북은 1.3명에 불과할 정도로 지역의 의사 부족 문제는 심각하다.

 

‘필수 의료’의 공백은 대도시라고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3월, 대구의 4층 건물에서 낙상 사고를 당한 10대 학생을 받아 주는 응급실이 없어 구급차에 실린 채 2시간 넘게 떠돌다 사망했다. 다발성 외상 환자를 수술할 흉부외과, 일반외과 등 병원의 배후 진료과 의사 부족 문제가 ‘응급실 뺑뺑이’의 주된 원인이다. 2022년 서울 아산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30대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개두술을 할 신경외과 의사가 없어 사망했다. 2700병상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병원이 이 정도면 다른 병원은 그보다 더 위태롭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20년 문재인 정부에서 의대 증원을 시도했지만, 의사들의 집단 반발로 실패해 안타까웠다.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의대 증원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 기대했는데 발표된 2000명 증원은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그러나 환영하기 힘들었다. ‘얼마나 늘리냐’보다 ‘어떻게 늘리냐’가 더 중요한데 2000명의 의사가 ‘필수 의료’, ‘지역 의료’에 종사하게 할 아무런 정책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 수만 늘려 놓으면 저절로 ‘필수 의료’, ‘지역 의료’로 유입되는 ‘낙수 효과’를 정부에서 기대하는 듯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지금도 11만 명의 활동 의사 중 3만 명 이상이 피부, 미용 영역에 종사하는데 의사가 증원되면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질지도 몰라 우려스럽다.

 

심각한 ‘지역 의료’, ‘필수 의료’ 공백의 근본 원인은 지나치게 ‘영리화’, ‘시장화’된 우리의 의료 체계에 있다. ‘시장의 실패’에 기인한 이러한 의료 공백 문제를 ‘시장형 의료 체계’는 그대로 둔 채 2000명 의사 단순 증원이라는 ‘시장의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늘어날 의사가 ‘지역 의료’, ‘필수 의료’ 영역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복무하게 할 시스템을 먼저 갖추고 의대 증원을 추진해야 하는데 순서가 처음부터 틀렸다.

 

지난 3월 16일 서울 대학로에서 개최된 '공공의료 찾기 시민 행진' 집회에 참석한 김동은 교수(왼쪽에서 네 번째). 사진 제공_ 공공병원설립운동연대

 

물론 의대 증원 발표 일주일 전 정부에서는 ‘필수 의료 정책 패키지’를 먼저 공개했다. 일부 의미 있는 내용도 있지만 ‘필수 의료’, ‘지역 의료’ 공백을 해결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계획은 없었다. 의료 혁신 전략이랍시고 제시한 대책이 ‘수가 인상’ 등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한 것이어서 더욱 실망스러웠다. 지역 의료 인력 확보를 위한 ‘계약형 지역 필수 의사제’는 거의 유명무실해진 현재의 ‘공중 보건 장학생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심각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대책은 한 줄도 없다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나 공백 없는 필수 의료 보장’. 지난해 10월 정부가 발표한 <필수 의료 혁신 전략>의 내용인데 이는 ‘의료 체계의 공공성’이 강화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의대 증원 역시 ‘의료의 공공성 강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지역 의료’, ‘필수 의료’에 관심이 있는 지원자를 선발해 국가나 지자체가 장학금으로 육성한 후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지역의 공공병원에서 복무하게 하는 ‘지역 의사제’의 도입이 우선 필요하다. 2000년대 들어서며 의사 부족 문제를 겪었던 일본도 ‘지역 정원제’를 시행해 의사와의 갈등을 무마하며 의사 정원을 늘릴 수 있었다.

 

공공 의대 설립 또한 필요하다. 졸업 후 일정 기간 의무복무를 조건으로 하는 공공 의대를 지리적 중심인 세종시 등에 설립하고 매년 300~500명의 ‘공공 의사’를 안정적으로 배출한다면 의료 공백 해결과 함께 공공의료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공의 공백’이 수 주째 이어지며 환자들의 불편과 고통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잘못된 정책 추진을 막기 위함이라 해도 의사가 응급실, 중환자실까지 떠나는 건 정당화되기 어렵다. 전공의가 병원의 ‘필수 영역’부터 서둘러 복귀해야 하는 이유다. 시민과 대중을 설득해야 정책 변화를 기대할 수 있으며 환자 곁을 끝까지 지킬 때 의사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 들어 줄 것이다.

 

의사협회 역시 의대 증원 안의 백지화만 주장한다면 시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의 적정 의사 수 결정은 우리 공동체 모두의 몫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사회적 논의’를 거쳐 의사 수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어야 한다. 의대 증원을 위해 정부가 의사들을 설득하고 협의하는 과정은 물론 필요하겠지만, 의사들이 허락하고 의사협회가 동의해야 의사 수를 늘릴 수 있다는 인식은 옳지 못하다.

 

미국, 일본, 네덜란드 등에는 의사 수급과 관련된 상설 기구가 있어 정부의 정책 결정에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일례로 일본의 ‘의료 인력 수급 분과회’에는 의사 단체, 병원협회, 전공의, 의대 교수, 시민 단체, 언론인까지 참여하고 있다. 우리도 정부 당국, 의료계, 시민 단체, 환자 단체 대표 등이 참여해 정기적으로 의료 인력 수급을 추계하고 의대 정원을 조정하는 시스템을 서둘러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정부의 ‘강경 일변도’ 대응이 바뀌어야 오늘의 혼란이 ‘심각한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막을 수 있다. 정부가 연일 ‘법정 최고형’ 운운하며 겁박하고 수천 명 전공의의 ‘의사 면허’를 정지시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내년에 당장 2000명이 한꺼번에 증원된다면 의대 교육에 걸릴 과부하가 솔직히 걱정이다. 해부학, 생리학 등 기초 의학 과목 교수는 지금도 부족하다. 정부는 의대 교수를 1000명 늘리겠다고 하지만 단기간에 실현되기 어려운 ‘탁상공론’이다. 의사 증원을 주장해 온 여러 국책 연구기관도 점진적, 단계적 의대 증원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처럼 여러 우려가 제기되고 사회적 논의가 불충분함에도 선거를 코앞에 두고 처음 제시한 2000명 의대 증원 안만을 정부가 끝까지 고집한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게 정부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지난달 27일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그러나 정부의 현재 대응 기조를 보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는 ‘2000명 증원’이라는 정책 관철에 방점을 찍은 듯하다. 정책의 목표가 아무리 정당해도 의도치 않은 국민의 피해를 줄일 의무 역시 정부에 있다. 이번 사태의 장기화로 환자들이 겪게 될 피해는 상상조차 어렵다. 정부와 의사들이 위험천만한 힘겨루기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그동안의 의·정 협의 과정에서 정작 의료 공백으로 큰 고통을 겪어 온 시민들은 배제되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와 의료계뿐만 아니라 중재에 나설 수 있는 시민사회가 함께 모여 지금의 갈등 상황에서 최선이라 할 수습 방안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환자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어떠한 정책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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