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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6) 내 동생 최성애 1탄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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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정확하게 22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다. 19718월에 첫 아들을, 197310월에 첫 딸을, 그리고 197512월에 막내딸을 낳았다. 오빠는 병원에서 힘들게 낳고, 나와 동생은 외할머니가 받았다. 동생은 태어나며 숨을 쉬지 않았다. 할머니가 코를 빨고 가슴을 문질렸다.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었단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했다. 신생아의 뇌에 산소공급이 안 되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에도 동생은 삼남매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았다.

내가 너를 낳느니 수박을 낳았다면, 맛나게 먹기라도 했지.” 어머니는 종종 동생을 이렇게 놀렸다. 아버지는 11녀로 만족하고, 자식을 더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빠가 아프니, 아들을 더 낳겠다고 동생을 낳았다. 낳기 전까지 분명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쳤단다.

우리 막내가 없었다면, 집안에 어떤 재미가 있겠어? 내가 정말 잘 낳았어. 잘 했지?” 어머니는 자신이 우겨 막내를 낳은 것을 자랑했다. 내게 동생을 준 어머니께 정말 감사드린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다. 우리 집은 작은 구멍가게를 했고, 아버지 아래 삼촌은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니 중학교 때도 있었네. 종종 돈을 내놔라고 난동을 부렸다. 그날은 어머니가 미리 우리에게 교육을 시켰다. 삼촌이 오면 파출소 순경에게 신고를 해라고 말이다. 집을 나와 순경을 발견했다. 말을 못하고, 졸졸 순경을 따라 갔다. 겨우 파출소 입구까지는 왔다. 그러나 파출소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둘 다 서성이고 있었다.

너희들은 언제부터 신고해라고 보냈는데, 지금 뭐하고 있니?” 어머니가 달려와, 우리에게 소리를 뻑 지르고 파출소에 들어갔다. 집에 돌아오니 난장판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탓했다. 나는 배다른 동생에겐 찍 소리도 못하고, 어머니만 잡는 아버지가 비겁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니 어머니는 우리에게 더 나빴다.

구멍가게를 하며 세를 살던 그 집의 주인은 형사였다. 낡은 주택에 살며 아파트에 살지 않는 이유가 감사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매일 집에 오면 양말에서 돈들 꺼낸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집은 딸 둘에 아들 하나였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라 잘 놀았다. 어느 날 형사 놀이를 하다가 동생이 그 집 아들에게 도둑놈이라고 했다. 그 누나들이 난리를 쳤다. 어디서 형사 아들에게 도둑놈이라고 하냐며, 도둑놈 보다 더 심한 말을 동생에게 했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후, 우는 동생을 달래며 미안하고 속상해 같이 울었다. 주인집 애들이라 그냥 듣고만 있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작은 군대와 같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인생 처음과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뺨을 맞았다. 그날 장학사가 오는지, 청소하고 정신이 없는 선생이 내 남자 짝꿍이 떠는 걸 보고, 나까지 교단에 불러 때렸다. 그 선생은 1주일 동안 잘못한 걸 모아서, 아이들을 오리걸음 시켰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오리걸음을 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이 많은 학생들을 매주 벌주는 것이 말이다. 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동생은 초등학교 들어가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오빠 7,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가 글을 가르쳤다. 삼남매 중 3살 동생이 제일 잘 배웠다고 한다. 동생은 동네에서 신동소리를 들었다. 그런 동생을 어머니는 학교에 일찍 보내려고 했는데, 교장이 받아주지 않았다. 동생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미 다 아는 거였다. 내 초등학교 선생은 구구단을 못 외우는 아이들을 화장실에 가두고, 다 외우면 나오게 했다. 화장실에서 열심히 구구단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동생은 공부로 힘든 일은 없었다고 한다.

동생이 4학년 때, 복도에서 공기놀이를 하다 6학년 주번 남자 선배에게 걸렸다. 울면서 벌을 쓰는 동생을 보고, 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우는 동생 달래서 교실에 들어가게 하고, 6학년 남자애랑 대판으로 싸웠다.

, 공부시간도 아니고, 쉬는 시간에 공기놀이를 하는 것이 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야? 너 앞으로 이따위로 주번 활동 하지 마. 그리고 내 동생 한 번만 더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둔다.”

당시 그 이후에도 나는 남자애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여자애였다.

맨날 돈을 가져가던 삼촌 말고, 우리 삼남매에게 잘 해주려고 노력했던 삼촌이 있었다. 그 삼촌과 한 번은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는데, 동생이 삼촌 말을 듣지 않았다. 삼촌이 버스에 동생만 두고 다 내리게 했다. 이 버스가 회차를 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동생을 잃어버릴까봐 너무 걱정이 됐다. 버스가 오고 혼자 우는 동생을 발견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다시는 어떤 누가 시켜도 동생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사건 때문인지 모르지만, 친가에서는 동생을 공부만 잘하고 성격 나쁜 아이로 단정을 하고 대했다.

중학생 때, 동생과 집에 오니 고모가 와 있었다. 고모가 동생이 인사를 안 했다고 진짜 지랄을 했다. 내가 고모를 진정시키고 동생에게 물었다. 정말 인사를 안 했고, 인사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나는 동생 마음을 이해했다. 친가 사람들은 우리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정말 많이 괴롭혔다. 동생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또 다른 삼촌에게 성추행을 당한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동생과는 했다. 나는 동생이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로 여겼다. 내 인생의 초반,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외할머니와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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