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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와 전문의가 협력하는 의료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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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5월호
세상 보기 - 공공의료 이야기


가정의와 전문의가 협력하는 의료


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저자


 

가정의(medico di famiglia, 일차의료 전문의) 안나마리아는 진찰실에 온 환자 누구에게나 넉넉한 시간을 내주며 상담한다. 그래도 지 씨(66세, 여)와 했던 상담은 특히 길었다. 안경 왼쪽 렌즈에 거즈와 반창고를 붙여 왼눈을 가린 채 들어온 그는 서류 뭉치와 함께 질문을 쏟아 냈다. 두 사람 사이에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데, 들어온 지 이미 한 시간이 되어 가건만, 대화 틈틈이 서류를 뒤적여 뭔가를 찾아보는 지 씨는 여전히 상의할 게 많은 눈치였다.

그가 가정의를 만나러 온 것은 2주 전에 받았던 전문의 진료 결과를 상담하기 위해서다. 이탈리아 국영의료에서는 가정의가 평소 건강관리를 담당하며 건강에 변화가 있거나 이상이 감지되면 진료센터나 병원에 의뢰해 환자를 전문의에게 진료받게 한다. 의뢰받은 기관에서는 진료를 시행한 뒤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해 가정의와 환자에게 보낸다. 보고서는 첫째, 가정의에게 검사 결과나 전문의 진료 결과를 자세히 알려 주는 문서다. 가정의는 이를 반영해 환자가 복용하는 약 처방을 바꾸거나 운동, 식사 등을 개선하게 해 건강관리에 적용한다. 둘째, 환자에게 자기 건강상태를 알려 주는 문서다. 환자는 가정의의 설명과 상담을 통해 결과를 이해하고 이에 따른 치료나 건강관리 방침을 받아들인다. 환자들은 대부분 보고서를 고이 보관하는데, 지 씨는 그날 서류철 통째로 갖고 왔다. 이번에 받은 것뿐 아니라 수백 장은 됨직한, 여러 해에 걸쳐 모아 둔 진료 보고서와 검사 결과 보고서가 빼곡했다.

 

전문의의 진료 보고서, 가정의의 긴 상담

“존경하는 ○○○ 선생님께, 당신의 환자인 지 씨를 외래 진료했습니다.”

진료센터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가정의에게 보낸 보고서는 이렇게 정중한 글귀로 시작되었다.

전문의는 먼저 환자에게 맹장 수술, 담낭 수술, 급성 췌장염, 어깨 수술을 받은 병력이 있고 갑상샘 질환의 가족력이 있다는 것, 3개월 전부터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복시(複視) 증세로 안과에서 정밀검사를 받았으며 신경과 진료도 받고 있다는 것을 기록했다. 이어서 갑상샘에 관한 혈액검사 결과를 꼼꼼히 적었다. 호르몬 검사의 항목별 결과와 세부 소견을 일러 주고 안과의 정밀검사와 호르몬 검사 결과를 연결해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환자에게 갑상샘 기능 항진증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나, 정확한 진단을 위해 초음파검사와 추가 혈액검사를 할 예정이라는 말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그 글이 작성되고 며칠 뒤 진료센터의 영상의학과에서 갑상샘 초음파검사가 시행된 듯, 안나마리아의 책상에는 이에 관한 결과 보고서도 이미 펼쳐져 있었다.

가정의와 환자는 거의 토론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었다. 안나마리아는 전문의 보고서와 갑상샘 초음파 결과 보고서, 서류철에서 찾아낸 예전의 다른 보고서를 두루 참고했다. 분야별, 시기별로 제각기 보고된 내용을 종합해 설명하고 과거와 비교해 환자의 이해를 도왔다. 지 씨가 단순히 수동적인 환자가 아닌 능동적인 판단 주체가 되고 싶어 하며 그래서 질문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자세히 답했다. 마침내 지 씨가 서류철을 정리하면서 상담이 끝났다. 안나마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은 처음 진찰실에 들어올 때보다 밝았다.

 

 

이처럼 전문의 진료를 받고 와서 상담하는 환자가 날마다 몇 명씩은 있었다. 심장내과를 다녀오는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이는 고령층 인구가 증가하면서 고혈압, 고지혈증 환자가 늘어 심장에 관련된 진료 의뢰가 빈번하게 된 때문이라 했다. 어떤 80대 노인은 8년 전부터 심장 박동기를 삽입한 상태로, 정기 점검일이면 아침 일찍 대학병원에 갔다가 오후에 곧장 이곳으로 와서 가정의에게 보고서를 전하고 약 처방을 받아 갔다. 앞서 지 씨만큼은 아니지만, 긴 시간을 상담한 환자도 있었다. 키 작고 눈도 작아 동유럽 이주민으로 짐작되는 중년 여성으로, 며칠 전 종합병원 응급실에 갔었다고 했다. 환자에게 심한 가슴 통증이 있어 심장 검사를 시행하고 혈압약, 위장약, 신경안정제를 투여했다는 응급실 의사의 보고서를 읽고 안나마리아는 그의 가슴을 청진한 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약을 처방했다.

 

외래 진료의 양대 기둥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정의의 일차의료, 전문의의 전문 진료는 이탈리아의 외래 진료체계를 구성하는 양대 기둥이다. 물리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 친숙한 가정의가 제공하는 생활 속 의료, 분야별 전문가인 전문의가 제공하는 정확하고 수준 높은 진료가 사람들의 건강을 지킨다. 양쪽은 진료 보고서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전문의가 작성하고 가정의에게 전달돼 환자가 설명 듣는 매체인 보고서로, 양대 의료진이 연결되어 협력한다. 같은 기관에 소속된 관계가 아니고 만난 적이 없어 얼굴도 모르지만, 전문의와 가정의는 환자를 위해 협력한다. 정확하고 우수한 진료가 제공되도록, 진료 결과에 관해 환자가 자세히 듣고 마음 편히 물어보도록, 보고서를 주고받으며 협력한다.

물론 이탈리아의 외래 진료 체계가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전문의 진료나 검사를 받으려면 예약 후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데에 국민의 원성이 크다. 진료를 받기까지 한 달씩 걸리기도 하고, 응급 상황이 아닐 경우 간단한 영상의학 검사를 하는 데 한두 달을 기다리기도 한다. 지역별로, 의료 과목과 분야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런 불평을 어디서나 흔히 듣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니,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의료를 이용하며 사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런 약점이 있는데도 국영 의료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의 지지가 크다. 평균수명 등 OECD 통계로 나타나는 건강 수준도 매우 높고, 만성질환에 대한 관리 수준 또한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이는 사회적으로 다른 요소의 영향이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아마도 위에서 소개한 가정의와 전문의의 역할 분담, 의사 간 협력, 이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그중 상당한 몫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의사와 환자 관계

전문의가 상세한 진료 보고서를 작성해 가정의에게 기꺼이 보낼 만큼, 이탈리아에서 환자와 가정의가 맺고 있는 관계는 공고하다. 행정적으로 볼 때 이 관계는 환자가 의료 이용을 위해 자유롭게 선택해 정하는 것이고 그런 만큼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오랜 기간 고정적으로 유지되며 상당한 신뢰가 뒷받침된다. 환자들은 수시로 가정의 진료실을 찾아가고 가정의와 친숙한 관계를 맺으며 이를 통해 국영 의료를 이용한다. 가정의 또한 환자와 교류하며 신뢰를 다지고 관계를 튼튼하게 해 일차의료 제공을 위한 기반으로 삼는다.

가정의와 환자 사이의 의사-환자 관계가 이탈리아 국영 의료의 토대이다. 국영의료 출발 당시부터 제도적 중심을 일차의료에 두었고, 그 뒤로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의료사업, 새롭게 도입되는 의료서비스 대부분을 가정의를 통해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인플루엔자나 코로나19 등에 대한 백신 접종,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한 가정 돌봄, 만성질환의 악화 방지 프로그램, 취약 계층을 위한 의료복지 통합 제공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의사와 환자 관계는 그 말조차 낯설다. 일차의료제도 없이, 등록 관계도 없이, 의료를 상품처럼 사고파는 우리식 ‘시장형 환경’에서 의사와 환자는 교류하기도 관계 맺기도 어렵다. 지금은 인구 고령화와 감염병 대유행의 위기에 직면해 의료제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시점이다. 모두를 위한, 효과적인 제도가 되게 하려면 변화의 핵심에는 일차의료, 그중에도 의사-환자 관계 형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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