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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로 만난 인연, 어르신의 자식 사랑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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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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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로 만난 인연, 어르신의 자식 사랑

권동희/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


 

“이제 저를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연락할 일이 없으면 더 좋겠지요. 제 전화번호도 지우시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사세요.”

산재 사건이 끝나면 저는 산재 노동자나 가족에게 저렇게 말하곤 합니다.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거나 큰 질병과 사고를 당하는 산재는 ‘비극’ 그 자체입니다. 2004년 말부터 산재 노무사 업무를 하면서 다양한 곳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 왔습니다. 자살로 남편을 잃은 배우자를 장례식장에서 만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과로사로 가족을 잃은 분들을 상담하거나 병원에서 만난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거리에서, 노조 사무실에서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본 것은 ‘눈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잃는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닥칠 비참한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피투성이가 되고, 목을 매고, 투신하고, 심지어 분신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눈물이 없을 수 없었고, 눈물이 마를 수 없었습니다. 

 

산재 사건은 짧게는 3~4개월, 소송까지 가면 길게는 2~3년이 걸립니다. 그 시간은 가족들과 재해자에게 피가 마르는 과정이며,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결론이 나면, 아픈 기억과 과정을 함께했던 저와의 모든 기억을 버리라고 합니다. 조금은 덜 아프고, 좀 더 웃을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런 말을 하곤 합니다. 산재도 저도 이제 모두 잊어버리시라고.

 

그런데 예외가 되는 사람이 두세 명 정도 있는데 그중 한 분은 춘천에 살고 계신 어르신입니다. 2008년도 민주노총 법률원에 있을 때 산재 사건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헤르페스바이러스 뇌염’에 걸려 산재 불승인을 받았다고 가족들이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2004년 말 저는 이미 ‘헤르페스 뇌염’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의 산재 사건을 맡았다가 불승인을 받은 아픈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때 배우자는 아기를 등에 업고, 5살 아이의 손을 잡고 자주 찾아왔습니다. 과로성 산재 사건은 처음이었고 불승인의 무게감이 저를 짓눌러 결국 소송은 다른 법률사무소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사무소에서 대법원까지 다투었지만 패소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의뢰가 들어왔을 때 선뜻 맡아 보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두려웠습니다. 산재 불승인이 한 가족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고, 4년 전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젊은 철도 노동자가 갑작스런 면역성 질환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한 상태였고, 앞으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사건을 맡기로 했고, 그때부터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노동자가 일한 곳은 강원도 증산역이었고, 그 당시 상황을 조사하고 동료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직접 가 보았습니다. 그때 노동자의 아버지인 어르신이 재해자의 외삼촌과 함께 오셨고, 산재가 인정이 안 된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얘기하셨습니다. 1심 소송은 3차례 준비서면, 감정촉탁, 증인신문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2009년 6월 11일, 변론이 종결되었고 8월 11일에 선고가 예정되었습니다. 

 

변론이 종결된 뒤에도 어르신은 “노무사님, 뭐라도 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탄원서를 빼곡히 적어서 주셨습니다. “판사님! 법은 국민을 위해 있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 아들이 발병 당시 당해 사업장에 근무하지 않았던들 지금 이 같은 현실에 처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현장 근무가 아닌 사무직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올 수 있었을까요?” 4장에 걸친 탄원서 끝에는 산재법의 기본 법리가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그 장소에서 근무하지 않았다면 그런 병이 올 수 있었을까 하는 기본적인 질문에 대답을 하고, 발생한 질병과 사고에 대한 보호를 해 줘야 하는 것이 산재보험법의 기본 정신입니다. 다행히 서울행정법원은 산재로 판단하였습니다. 이후 공단이 불복하여 항소했지만 서울고등법원에서도 우리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사건이 끝났어도 어르신은 장남에게 일어난 산재라는 큰 불행을 깊이 고민했고, 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서 여러 일들을 상의했고 저 또한 도와드렸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내려가서 만났습니다. 어르신은 술잔을 기울이며 다른 두 자식들에게도 하지 못한 속사정과 고민들을 저에게 얘기하셨습니다. 

 

재해자의 어머니는 24시간 집에서 장애인이 된 아들을 돌보느라 디스크가 터질 정도로 몸은 이미 망가졌고 지쳐 갔습니다. 본인들이 하루하루 늙어 갈수록 장남의 삶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자신들이 세상을 떠나면 아들의 몸과 마음은 누가 돌볼지…. 깊은 한숨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자식과 부모의 인연과 책임이 무엇인지 많이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런 만남을 이어 가다 보니 13년이 흘렀습니다. 어르신은 저를 아직도 가족의 은인처럼 맞아 주시고, 저는 시골 농부로서 삶의 경륜을 가진 ‘어르신’으로서 만나고 있습니다. 어르신에게는 저 말을 꺼낼 기회를 놓쳤는데,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우지 못한 부모로서의 책임과 사랑이 무엇인지 잘 배웠으니까요. 아직도 그 배움은 진행 중입니다.

  • 함연경 잘 읽었습니다 ♡ 2022-08-09 18:26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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