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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노무사의 길로 이끈 농활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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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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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노무사의 길로 이끈 농활

 

권동희/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

 


“야, 동희야 그럼 니가 한번 맡아 주면 안 되나, 니가 삼성 백혈병 사건도 하고 잘 알았잖아.”

 

2010년 겨울 오랜만에 만난 형님은 소줏잔을 들이켜면서 큰아들 녀석이 군대에서 백혈병에 걸려 전역했는데 국가유공자 신청에서 탈락했다고 힘들어하셨어요. 얘기를 들어 보니 큰아들이 군대 가서 1년 8개월 만에 만성골수백혈병 진단을 받아 전역하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었는데, 군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지요. 군인, 공무원 재직 중 산재가 인정되더라도 보훈청의 심사(국가유공자, 보훈대상자)는 별개의 판단이기 때문에 막연한 기대를 갖고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설명해 드렸지만, 잘 납득하지 못했어요. 사실 지금도 대부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에요. 그때 형님은 큰아들의 삶이 군대에서 얻은 백혈병으로 망가진 것에 매우 슬퍼하셨고, 어쩔 줄 몰라 무척이나 답답해하셨어요. 마치 본인의 삶이 끝난 것인 양.

 

형님을 처음 만난 건 제가 대학교 2학년 여름이었지요. 1994년 여름. 그때가 아마 우리나라 여름 중 가장 더웠을 때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여름 농촌활동을 저희 학교에서는 봉화로 가게 되었고, 그때 봉화군 시내에서 한참이나 더 들어가는 재산이라는 곳에 저희 동아리가 배정되었지요. 저는 집이 근처 영주인지라 봉화가 어딘지, 재산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동아리 구성원들, 특히 서울에서 자란 후배들은 이런 시골이 있었나 하며 매우 신기해했어요. 그때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농민회 활동을 하시는 형님과 동네 다른 형님들과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술도 많이 마셨지요. 그렇게 새벽까지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어도 형님은 항상 새벽에 먼저 일어나 고추밭에 농약을 치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형님의 큰아들 녀석이 아마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되었을 거예요. 봉화 재산에서도 성실하고 착하기로 소문난 형님은 농사일도, 농민회 일도 참 열심이었죠. 그 이후 가을 농활, 겨울 농활을 핑계로 형님에게 몇 번 더 갔었고, 겨울에는 개구리도 잡아서 튀겨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런 인연으로 형님을 알게 되었고, 몇 년 뒤 농사일을 완전히 접고 영주로 나와 화물 노동자로 살게 된 형님을 지금까지 만나 오고 있지요. 

 

 

생각해 보면 이제 형님과 인연도 거의 28년이 다 되어 가네요. 1학년 때는 봉화보다 더 시골인 영양으로 선배들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농활을 갔었지요. 그때 규율도 너무 엄격하고(쉴 때 벽에도 기대지 못하게 하고 등등),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만 하고 저녁에는 분반 활동하고 평가 등등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5일이 지나 저는 집에 가겠다고 했었지요. 그때 선배들이 저를 잡고 밤새 여러 얘기를 했어요. 선배들의 애정 어린 설득에 농활과 동아리에 남아 있게 되었고, 그게 대학 4년 내내 농활을 가게 된 밑거름이자, 제가 사회 진출을 노동자의 편에 서는 공인노무사로 하게 된 계기였어요. 

 

당시 형님의 그런 제안을 받고 많이 생각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형님은 제가 가족처럼 생각하는 몇 안 되는 분이었어요. 법률가들의 사건 수임 원칙에 “가족의 사건은 담당하지 않는다”라는 게 있었어요. 형님과의 소중한 인연에 찬물을 끼얹게 될까 많은 걱정이 들더군요. 당시 저는 삼성 백혈병 1차 소송단에서 판례 및 법리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고, 2022. 6. 23. 선고에서 저희가 1심에서 승소했지만(서울행정법원 2010구합1149판결), 큰 녀석 사건은 삼성 백혈병보다 더 어렵다고 보았어요. 왜냐하면 직접 사용한 물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고, 군대에서 업무와 업무 환경에 대한 자료나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일반 노동자의 경우 MSDS(물질안전보건자료)나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 특수건강검진 결과서 등이라도 있지만, 군대라는 특수한 곳은 이런 것이 전혀 없고 접근하기도 매우 어려웠어요. 무엇보다 군 복무 기간 즉 노출 기간이 삼성 백혈병 사건보다 더 짧은 불과 1년 8개월이었어요. 그래서 많이 망설였고, 겁도 났지만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부탁하는 형님의 간절한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어요. 어렵게 “그래 한번 해 보자.”라는 결심이 선 후 하나씩 접근해 보았어요. 큰아들을 만나 사용 물질, 업무 내용, 업무 방법, 보호구, 업무 환경 등을 확인하고, 복무 당시 중대장을 겨우 연락해 당시 사용했던 시너를 입수해서 성분 분석을 해 보았어요. 생각보다 높은 농도의 벤젠이 함유되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의견서를 받아 소장을 제출하고 싸움을 시작하였지요. 보훈청과 수차례 공방과 진료 기록 감정과 사실 조회 촉탁 신청 등을 거쳐 2012. 7. 6. 대구지방법원에서 “국가유공자 비해당 결정을 취소한다”라는 판결(대구지법 2012. 7. 6. 선고 2011구단1288판결)을 받아 냈고, 너무 기뻐 그 즉시 형님에게 전화를 했었지요. 그때 형님은 어딘가 배송하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환호성을 질렀어요. 다시 1년 반이 지나 다행히 항소심에서 이겼고, 사건은 확정되었지요(대구고등법원 2013. 11. 22. 선고 2012누1656판결).

 

판결 이후 수년이 지나 큰아들은 완치에 가깝게 잘 치료되었고, 결혼도 하고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고 있어요. 물론 국가유공자로 여러 혜택도 받았지요. 형님이 끔찍이 아끼는 손녀도 생겼고요. 생각해 보면 농활 가길 참 잘했어요. 지금의 산재 노무사로 이끌어 줬던 길이었고, 삼성 백혈병보다 더 어려운 사건도 해냈잖아요. 무엇보다 형님을 만났잖아요, 우리 형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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