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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생활글 공모전 작은책상] 다정한 시_ 만화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작업 분투기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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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생활글 공모전 수상작 작은책상

 

다정한 시 _만화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작업 분투기
 

김홍모


1.

동수 내레이션: 세월호 중앙 홀은 전쟁터 같았다.
물 위에 아이들이 둥둥 떠 있고 주방 기구들은 다 나와 있었다.
자판기가 하늘에 매달려 있고 그 밑에 어린아이, 학생들, 나이 든 이들이 나오려고 계단 난간을 잡고 있었다.

 

동수: (소방 호스를 던지며) 이거 잡아요!
동수: 끌어 올리게 몸에 묶어요!
승객1: 아저씨, 저기 기둥에 소방 호스를 묶어요! 우리가 잡고 올라갈게요!

 

동수 내레이션: 배가 기울어지면서 중앙 홀로 가는 길은 낭떠러지가 되었다.
양쪽 기둥에 묶은 소방 호스를 잡고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동수: (홀에 있는 할머니들을 보며) 할머니! 어서 올라오세요!
할머니1: 우리는 괜찮으니까 젊은 사람들, 힘쓸 수 있는 사람들 먼저 올리고 다음에 우리 구해 줘.
동수: 알았수다!

 

동수 내레이션: 빠져나온 승객들이 함께 탈출을 도왔다.

승객1: 학생! 조금만 더 힘내요!
학생1: 으….
학생1: (중앙 홀로 떨어지며) 으아악!!
동수: 큰일이다. 버티질 못하네…. 소방 호스 하나 더 가져와야겠어요!
동수: (건너편 승객들을 향해) 기둥에 묶어요!

 

학생2: (두 겨드랑이에 소방 호스를 끼고 건너오며) 으…. 엄마….
동수: 조금만 더 힘내!
학생2: 아…. 아저씨 안 되겠어요.
학생2: (팔에 힘이 풀리며) 아악!
동수: (몸을 기울여 학생을 잡으며) 꽉 잡아!!
동수: (학생을 들어 올리며) 으아아!

 

휘익.
쿵!

 

동수: (학생2를 보며) 괜찮아?
학생2: 네….

(배가 갑자기 ‘기기기긱’ 하며 기울어진다.)

동수, 학생2: (옆으로 쓰러지며) 으아아악!! 

 

웅웅웅웅웅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이명이 들릴 때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울증과 불안감이 밀려와 도무지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이제 곧 웹툰 플랫폼에 다음 편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쉬어야 한다.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이 늦었다. 
헤드폰을 끼고 이명을 완화시키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꼭 끝내야 한다.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동수 씨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콘티를 보며 스케치를 하고 먹선을 긋고 스캔을 한다. 채색과 웹툰 편집은 다행히 친구가 도와주고 있어 먹 작업까지만 무사히 끝내면 이번 마감도 시간 내 성공할 수 있을 거 같다.

바다에 떠 있는 세월호를 그리고 그 안에 갇혀 탈출하려 애쓰는 학생들을 그린다.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쓰는 동수 씨를 그리는데 살 떨리는 그 순간이 상상이 된다.

 

(점점 가라앉는 세월호, 그 위에 해경 헬리콥터가 큰 소리를 내고 있다.)

투타타타타타타-

동수 내레이션: 배는 90도 가까이 기울어지고 있었고 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는 그때 본 것들이 너무 괴로운 기억이라 보호본능이 작용해서 기억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오히려 기억이 안 나는 게 좋을 거라고.

기억을 하게 되면 못 견딜 거라고.

나중에 해경에서 찍은 영상을 봤는데 나는 혼자 세월호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무엇을 봤을까.

기억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승객3: 아이 좀 구해 주세요!

덜덜 떨리는 팔로 구명조끼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구명조끼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2.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수백만의 촛불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도 2년이 되었다. 세월호 진상규명도 되고 책임자도 제대로 처벌되겠지, 그냥 그렇게 안심을 하고 있었고 4월 16일 그날 아침에 느꼈던 슬픔과 절망, 울분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평소 친분이 있던 세월호 유가족이 제주에 내려온다고 해서 오랜만에 만나러 갔다. 쿠덜털털거리는 오래된 픽업트럭을 타고 숙소로 갔다. 거기서 우연인지 운명인지 김동수 씨와 가족을 처음 만나게 됐다.

 

김동수 씨는 세월호 생존자다.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파란 운동복을 입고 승객들을 많이 구해 ‘파란 바지 의인’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인상 좋은 동네 형 느낌이었다. 그런데 손과 팔에 여기저기 칼에 베인 듯한 흉터가 있었다. 동수 씨를 만난 이날 세월호 생존자의 트라우마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잠을 잘 때도 길을 걸을 때도 학생들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고 세월호 안에서 본 승객들의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고 한다. 살린 사람은 기억나지 않는데 살리지 못한 사람들은 대못처럼 기억에 박혀 동수 씨를 괴롭힌다. 

동수 씨가 세월호 참사의 그날을 이야기할 때는 눈빛도 손도 덜덜덜 떨린다. 5년이 지났는데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동수 씨는 아직도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그 떨리는 손으로 구명조끼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세월호 생존자의 트라우마가 이렇게 심한 줄 몰랐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학생들과 유가족만 생각했지, 생존자들이 매일 환청과 환각, 벌레가 기어오르는 느낌이 들어 팔을 잘라 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받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심각할 때 마음 놓고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도 없었고 국가의 대책도 없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5년이나 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세월호에서 승객들을 많이 구한 의인이 영웅으로 칭송받지는 못할망정 죄책감으로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이분의 스피커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세월호에 대해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세월호 참사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지만 예전에 용산참사 만화 《내가 살던 용산》도 작업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3.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번에 인사드렸던 만화가 김홍모입니다.”

“만화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인터뷰 가능할까요?”

“네, 아… 네. 그러면 언제 가면 될까요?”

“네. 그럼 그날 사려니 숲길 앞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가는 동안 어떤 걸 물어보면 좋을지 다시 점검하고 고민을 했다. 예전에 용산참사 만화를 작업할 때도 그랬지만 이런 인터뷰는 확실히 긴장이 된다. 혹시나 상처가 되는 질문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인터뷰를 하다 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다시 생각나게 할 텐데 더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든다. 그렇다고 너무 조심스럽거나 위축되면 정작 물어야 할 걸 묻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내가 왜 이 작업을 하려고 하는지, 내가 왜 동수 씨의 스피커가 되려고 하는지. 

이 작업의 첫 번째 목적은 세월호 생존 피해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온전히 전하는 데 있었다.

 

동수 씨와의 인터뷰는 의외로 수월했다. 배가 넘어가고 학생들을 구조할 당시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가 떨리고 구조하지 못한 승객들의 눈빛을 이야기할 때는 여전히 손이 떨렸지만 동수 씨는 하나라도 더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언론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날의 참상을.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언론사가 와 있었다. 방송에서는 여전히 ‘세월호 전원 구조’ 자막이 나오고 있었고, 동수 씨는 언론에 전원 구조 아니라고 배에 200~300명이 갇혀 있다고 빨리 구조해야 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보도되지 않았다. 급기야 생방송 마이크를 뺏어 소리쳤다.

 

“전원 구조 아니라고! 배 안에 아직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국가가 구조를 안 하고 있다고요!”

이후에도 동수 씨는 많은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복기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날 바다> 팀에서도 인터뷰 연락이 와 힘들게 몇 시간이나 인터뷰를 했다. 영화 개봉 날 두근거리며 상영관을 찾았는데 동수 씨 인터뷰는 통편집이 돼 있었다. 영화는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닻을 내려 일부러 침몰시켰다.’라는 음모론을 진실인 양 이야기하고 있었고 동수 씨는 그 생각과 달랐다. 세월호를 많이 탔었던 동수 씨는 닻을 내려 침몰한 것도 아니고 잠수함에 부딪힌 것도 아니었다고, 정말 중요한 건 자신이 직접 보고 겪었던 ‘국가가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문제라고 늘 이야기했었다. 세월호 참사 초기 침몰 원인과 관련해 음모론이 난무했고 대부분 언론은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동수 씨가 이야기한 국가의 구조 방기 문제는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았다.

 

세월호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승객들을 구조하다 나왔기에 중요한 증언을 할 수 있었던 동수 씨는 세월호 청문회에도 초청을 받지 못했다. 동수 씨의 목소리는 진보건 보수건 뒷전이었다.

여기에 많은 상처와 응어리가 있던 동수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계속 이야기를 했다. 핸드폰으로 녹음을 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받아 적던 나는 이 작업에 점점 더 큰 사명감 같은 걸 느꼈다. 반드시 세월호 생존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동수 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아내인 형숙 씨와 자녀 예람 씨, 예나 씨와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세월호 참사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생존자의 가족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분들의 이야기도 만화에 담아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형숙 씨는 웃음도 많고 밝은 성격이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 가족이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건 형숙 씨의 힘이겠다 싶었다. 남편이 수차례 자해를 해 생사의 경계에서 힘들어할 때 굳건하게 손을 잡고 있던 게 형숙 씨다. 응급실에서 진상 환자 취급을 당하고 언제 폭발할지 모를 동수 씨를 옆에서 지켜 준 든든한 버팀목.

첫째 딸 예람 씨는 언론과 인터뷰를 절대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나와의 인터뷰는 허락을 해 줬다. 아마도 내가 인상 좋고 잘생긴 만화가여서가 아닐까 싶다.

세월호 참사 후 아빠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을 지키던 예람 씨는 아빠의 인터뷰를 듣고 또 들었다. 언론에서 병원으로 인터뷰 올 때마다 동수 씨는 최선을 다해 인터뷰에 응했고 옆을 지키던 예람 씨는 그 아픈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고 또 들어 인터뷰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화장실에서 아빠의 자해가 있던 날. 응급구조학과를 나왔지만 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아빠에게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119 구조대가 오고 엄마는 아빠와 구급차에 함께 타 병원으로 가고 예람 씨는 홀로 남아 아빠가 흘린 피를 다 닦았다. 도서관에 간 막내 예나가 보면 놀랄까 봐. 예람 씨는 이때의 기억이 없다. 마치 세월호에서 아빠의 마지막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세월호 단원고 학생들과 나이가 같은 예나 씨는 참 씩씩하다. 학교에 친구들이 등교할 때 세월호 리본 나눔을 하고 참사 1주기 때 제주 고등학생들을 모아 세월호 추모 플래시 몹도 진행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할 때 가장 많이 울었다. 천사 같은 언니 이야기할 때 울고 엄마 없었으면 가족이 못 버텼을 거라며 울고 아빠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 

딸 바보였던 아빠가 세월호 참사 후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인한 분노 조절 장애가 생기고… 가족에게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한다. 세월호에서 국가가 하지 않은 구조 활동을 하다 생긴 트라우마를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 사람들을 많이 구해 ‘파란 바지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랑스러운 아빠의 몸에 자해로 인한 상처가 하나둘 생기고 마음의 병도 깊어져 간다. 

“아빠가 차라리 혼자만 살겠다고 그냥 나왔으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을 거예요.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구하려다 나오지 못한 학생들을 보고…. 그냥 처음부터 구조 활동 안 하고 나왔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았을 텐데….”

“국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아빠와 가족은 이렇게 고통의 삶을 살고….”

“이제 누가 힘들어하건 어쩌건 그냥 이기적으로 살면 좋겠어요.”

엉엉 울며 인터뷰를 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기적으로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녹취록을 정리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의인의 삶이, 의인과 가족의 삶이 고통이어서는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 없다. 이 사회는,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했다. 촛불로 부정한 정권을 탄핵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지만 나아지는 건 별로 없었다, 적어도 이 가족들에게는.

 

 

4.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집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집에 세 권이 있지만 첫 페이지도 보지 못했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세월호 관련 영상도 피해 다녔고 아이들이 구조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찍었던 영상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 만화 작업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피할 길은 없었다. 세월호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시나리오 한 글자도 나올 수 없으니.

 

김동수 씨와 가족의 인터뷰를 정리하고 세월호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가설을 진실인 양 이야기하는 게 많았기에 확실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믿을 만한 언론에서 나온 세월호 관련 특집 보도와 서적들을 읽었다. 그리고 도저히 못 보겠다고 생각했던, 배가 침몰하는 순간 학생들이 찍은 영상까지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학생이 찍은 영상 하나를 보고 마음이 무너져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쓰면 자꾸만 감정이입이 돼서 쓰다 말다를 반복기도 했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위이이이이잉 하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려니, 곧 사라지겠지 생각했지만 자고 난 이후에도 이명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아 왼쪽 귀로만 생활을 했는데 왼쪽 귀마저 이명이 들리기 시작하니 불안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불편한’ 정도였다.

계속 이명이 들려 할 수 없이 이비인후과에 갔는데 약을 처방받고 괜찮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에 안심을 했다. 한창 작업을 진행해야 할 때라 아프기라도 하면 낭패이기 때문에 밥도 잘 먹고 열심히 약을 먹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만화 제목은 ‘홀’로 정했다. 동수 씨가 잊지 못하는 장소. 동수 씨가 자꾸만 세월호로 빨려 들어가는 그 홀. 

웹툰 연재를 할 계획이었기에 7화 분량을 먼저 작업해서 웹툰 플랫폼 몇 곳에 보냈다.

 

‘의미 있는 작업임에는 분명하나 저희 플랫폼과 맞지 않아 연재는 어렵겠습니다.’

보내는 곳마다 이런 답장을 받았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세월호 이야기만 나오면 ‘지긋지긋하다’며 악플이 수백 수천 개 달리는 현실에서 돈도 되지 않는 작품을 플랫폼에서 연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퇴짜를 몇 번이나 맞고 웹툰 연재는 포기해야 하나 상심하고 있는데, 한 플랫폼에서 연재가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PD 회의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7대3으로 통과가 돼 연재할 수 있게 됐다고 담당 PD가 더 신이 나서 연락을 해 왔다. 이 세월호 만화를 자기 회사 플랫폼에 꼭 연재하고 싶어 했던 고마운 분이었다. 이제 계약을 하고 바로 연재를 시작하면 되는데 며칠 후 담당 PD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작가님 너무 죄송해요.”

“네? 왜요?”

“대표님이 불러서 올라갔는데….”

 

결국 이 플랫폼에서도 연재를 못 하게 되었다. PD 회의에서의 결정을 대표가 뒤집어 버렸다. 또 플랫폼과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대체 무엇이 맞지 않는지. 웹툰이 왜 상업적이어야만 하는지 답답했다.

 

연재를 못 하면 생활비를 벌 수 없고 생활비가 없으면 작업을 어떻게 하나…. 인터뷰와 시나리오 작업만 1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모아 둔 돈도 거의 바닥이 보이고, 지인 몇 명에게 출판할 때 인세를 나누기로 하고 투자를 받은 돈도 거의 떨어져, 고료를 받으며 연재하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웠다. 집세도 내야 하고 양육비도 보내야 하고 딸이 다니는 지리산에 있는 작은 대안 학교에 학비도 내야 하는데…. 앞이 막막했다.

 

담당 PD가 ‘딜리헙’이라는 독립 웹툰 플랫폼이 있는데 거기는 고료는 없지만 블로그처럼 누구나 연재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해서 들어가 봤다. 꽤 많은 웹툰이 연재되고 있었고 유료, 무료를 작가가 정할 수 있어서 여기에라도 연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연재를 시작했다. 

 

웅웅웅웅웅웅웅-

이명이 전혀 낫지 않고 있었다. 다른 병원을 가 봤지만 이명이란 게 원래 원인도 찾기 힘들고 치료도 어려운 병이라 약을 계속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연재는 7화까지 무료고 이후부터는 유료로 전환할 계획이었다. 유로로 전환했을 때 얼마나 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세월호 참사가 6년이 넘어가니 이제 언론에도 잘 나오지 않고 관심사에서 꽤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정부가 바뀌었지만 진상규명은 요원했고 생존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문재인 정부가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만 있을 뿐이었다. 

 

유료 연재가 시작되자 독자 수가 급감했다.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플랫폼도 아니고 유료화했을 때 결제 시스템도 익숙하지 않은 터라 10분의 1 정도로 독자 수가 줄었다. 결국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도 유료로 생활비를 벌 것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다시 무료 연재를 할 것인지.

 

고민 끝에 무료 연재로 바꾸었다. 애초의 의도가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를 내가 스피커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으니, 생활비는 다른 일을 해서 벌더라도 가급적 많은 독자들이 볼 수 있게 무료 연재로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 상태 때문에 격주 연재를 했는데 틈날 때마다 일러스트 작업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일러스트 마감에 ‘홀’ 마감에 쉬지 못하고 작업하는 날이 계속되었지만 많은 분들이 세월호 웹툰에 응원을 보내 주셨다. 무료 연재임에도 한 회당 몇만 원씩 후원을 해 주시는 분도 계셨고 이명에 좋다는 한약을 보내 주시거나 영양제를 보내 주시는 분도 계셨다. 지지해 주시는 분들의 응원에 힘을 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수 있었다. 특히나 채색과 편집을 도와주는 달과 작가님 덕분에 매회 무사히 마감을 할 수가 있었다.

 

연재가 중반을 넘어갈 무렵 갑자기 이명이 심해졌다. 이명뿐만 아니라 급성 난청까지 생겨 소리가 잘 안 들리고 윙윙윙윙- 하는 소리 울림 현상까지 생겨 버렸다. 이명이 심해지면서 우울증과 불안증도 생겨 잠을 잘 못 잤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육지에 있는 이명 치료로 유명한 이비인후과에 갔다.

“메니에르입니다.”

2시간에 걸친 검사 끝에 내린 의사의 진단이다. ‘메니에르증후군’이라고 하는 이 병은 아직 뚜렷한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한다. 

“주로 스트레스가 원인인데 하시는 일이…?”

“만화가예요.”

“아, 작가님이시구나. 스트레스를 줄여야 해요.”

“네….”

“술, 담배, 커피 안 되고요. 잠을 잘 자야 합니다.”

“나아질 가능성은 있나요?”

“나아지긴 쉽지 않을 거예요.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를 해야 합니다. 처방해 주는 약 한번 꾸준히 먹어 보세요. 좀 비싼 약이긴 한데 어느 정도 나아질 수 있을 겁니다.”

제주도에서 왔다고 하니 한 달 치를 처방해 주었다. 옆에 있는 약국에 갔는데 약값이 60만 원이 넘었다.

 

 

5.

쿠달탈탈 털털털 터터덜덜-

20년 가까이 된 무쏘 픽업트럭을 타다 보니 여기저기 고장이 잦다. 시내에 일이 있어 나가는데 이번엔 뭐가 고장 났는지 차에서 탱크 소리가 난다. 이명에 소리 울림까지 있어 시끄러운 차를 운전하면 상당한 고통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부디 30만 킬로까지만 버티길 바라면서 도로를 달렸다.

 

쿠달탈탈 털털털 터러러-

웅웅웅웅 윙윙윙윙윙윙-

차 소리에 이명에 죽을 맛이다. 빨리 시내를 다녀와서 다음 편 마감을 해야 하는데. 내일이 업데이트 날이라 마음이 급했다. 한참을 달리는데 갑자기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는다. 

“어어어어어!”

신호 대기로 정차해 있는 차를 반대쪽으로 피해 중앙선을 넘고 다시 차도로 들어와 간신히 차를 세웠다. 반대편 차선에 차가 멈춰 있었기에 망정이지 달리는 차가 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스쳐 갔다.

‘내일 마감인데.’

‘사고 나면 안 되는데.’

웹툰 업데이트할 때마다 형숙 씨와 막내 예나 씨가 목이 빠지게 기다려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 위험한 순간에도 마감 생각뿐이었다.

 

꼭 살아서 이 만화를 끝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 다큐 영화에서 통편집을 당하고 언론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제대로 다뤄 주지 않아 받은 상처가 동수 씨에게 많은데, 나까지 하다가 멈춰 버리면 안 될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작업을 끝내고 책으로 출간해 많은 사람들에게 동수 씨와 가족의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부디 그때까지 살아 있길. 비상 정차한 차 속에서 부디 무사히 작업을 마칠 수 있길 빌고 또 빌었다. 

깊게 꽉 누르면 어느 정도 브레이크가 걸려서 조심조심 차를 타고 시내를 나갔다. 놀라서 그런지 이명이 더 심해졌다. 웅웅웅웅 윙윙윙윙윙윙- 또 우울감과 불안감이 몰려온다.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핸드폰 음악 앱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선경의 노래를 틀었다.

 

다정한 시

가장 좋은 단어로 멋진 시를 써 보려고
온종일 생각하고 밤새도록 고민해도
내가 가진 단어만으로 빈 곳을 채울 수 없어 
이렇게 저렇게 해 봐도 꼭 있어야 할 말들이 없어
어쩔 수 없나 봐 시를 쓰긴 다 틀렸나 봐
실망하고 구겨 버린 종이를 주워 너는
무슨 말인가 쓰고 지웠다가 또 쓰고
그렇게 내게로 돌아온 조금 더 낡아진 종이엔
내 빈 단어들 사이에 너의 단어가 더해져
가장 멋지진 않지만 하나의 시가 되었네
혼자서는 쓸 수 없는 무척 다정한 시
음- 다정한 시

 

시내를 무사히 다녀오고 마감을 끝냈다. 일찍 자야 한다니 늦어도 밤 11시 30분 전에는 누우려고 노력한다. 시내 나간 김에 쌍용자동차 정비소에 갔는데 브레이크가 터져 정말 위험할 뻔했다고. 게다가 고장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다 고치려면 찻값보다 많이 나갈 테니 폐차시키는 게 나을 거라 조언을 해 준다. 폐차를 시키면 새로 차를 살 돈이 없는데 어쩌나. 무료 연재라 고료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틈틈이 하는 일러스트 일만 가지고는 생활이 어렵다. 생활비도 다 떨어져 다음 달 카드값도 걱정이고. 뒤척이다 보니 벌써 새벽이다. 자야 하는데, 자야 이명이 심해지지 않는데, 잠이 안 온다. 할 수 없이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밥을 먹는데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김 작가님 어떻게 지내세요?”

“저야 뭐 늘 작업하면서 지내지요.”

“김 작가님, 제가 이번에 강남에 회사를 하나 차려서 이사를 했는데 거기에 걸 큰 그림이 필요해서요. 작품 하나만 그려 주세요. 천만 원 드릴게.”

“네?”

부동산 쪽 일을 하면서 록밴드를 하는 독특한 분이다. 밴드 앨범을 그려 준 인연으로 알게 되었는데 내가 힘들 때 여러 도움을 주셨었다. 한동안 사업이 어렵다가 이번에 잘 풀려 갑자기 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고. 내가 어떤 작업을 주로 하는지 아니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연락을 하신 것 같았다. 오랜만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을 그렸고 덕분에 한동안 생활비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연재 막바지 즈음 친구가 4.16재단에서 ‘모두의 왼손’ 공모를 한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혹시나 해서 그곳에 ‘홀’을 보냈다. 준비와 연재까지 2년 동안 열심히 해 온 작업이라 작은 상 하나만 타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 같았다. 4.16재단에 작품을 보내고 두근두근 기다리다 발표날이 다가왔다.

 

4.16재단 ‘모두의 왼손’ 공모
예술 부문 대상
‘홀’ - 김홍모

 

아, 정말 그동안의 고생에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기쁜지 상을 받으러 안산으로 가는 동안 비행기 타는 것도 지하철을 타는 것도 이명 때문에 힘들었지만 참을 만했다. 대상은 상금이 커서 책이 나올 때까지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무사히 연재를 마치고 출간 작업에 들어갔다. 출간은 창비출판사와 하기로 했고 출간을 위한 편집 작업도 달과 작가님이 도와줘 한결 수월했다. 출판사에서 책 제목은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임을 알 수 있게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로 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이 만화가 무사히 연재를 마칠 때까지 많은 분들의 응원과 도움이 있었는데 그냥 책을 내는 것보다는 시민의 힘을 모아서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면서 알아보니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북 펀딩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거다 싶어 출판사에 연락을 해서 알라딘 북 펀딩을 진행하자고 했다. 알라딘 쪽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니 좋다고. 수익은 전액 ‘제주 세월호 생존자를 위한 모임’에 기부하기로 결정을 하고 북 펀딩을 진행했다.

북 펀딩은 하루 만에 목표를 초과했다. 최종적으로 1070명이나 참여를 해서 1쇄 면지에 그분들의 이름을 다 넣었다. 시민들의 힘으로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가 출간하게 되었고 1쇄를 5천 부나 찍게 되었다.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김홍모, 창비, 2021)

 

6.

마당에는 여름에 심어 놓은 국화가 활짝 피었다. 그 사이로 자그마한 흰나비들이 춤을 추듯 날아다닌다. 처음 듣는 것 같은 새소리가 파란 하늘을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데 어느 나무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창밖을 보니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씨다. 

출간한 지 1년이 넘었고 12번의 북 콘서트(북 토크)가 있었다. 동수 씨, 형숙 씨와 함께 서울, 경기 퇴촌, 곡성, 춘천, 부산 등 전국을 다녔다. 책이 나오고 가장 기뻐한 건 형숙 씨였다. 누군가 세월호 생존자에 대해 물으면 이제 이 책을 건네주면 된다. 동수 씨가 세월호 안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구했는지, 그 후 트라우마로 어떤 고통을 겪었고 가족들이 어떻게 버텨 왔는지 많은 시민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형숙 씨 말로는 집안의 ‘보물 1호’라고 한다.

동수 씨는 책이 나올 거라는 기대를 안 했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겠다, 책을 내겠다 어쩌겠다 해 놓고 실제로 나온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디어 자기 이야기가 온전히 담긴 책이 나왔다. 마음이 아파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학교 동창이나 교회 분들에게 열심히 책을 홍보한다.

예람 씨는 아직까지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읽겠다고. 얼마 전에 취직도 하고 점점 에너지가 올라가고 있으니 조만간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나 씨는 웹툰 연재할 때부터 한 회도 빠짐없이 만화를 봤다. 책이 나왔을 때 대구 응급실 간호사로 있었는데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 정말 멋있다고, 이렇게 잘 이겨내 왔다고. 

병원에서 이달의 책을 선정하는 게 있는데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가 이달의 책으로 선정됐다고 한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명과 소리 울림이 여전히 있지만 그전처럼 심하지는 않다. 가을 햇살에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은 된다.

많은 시민들이 힘을 주고 응원을 해 줘서 무사히 책을 낼 수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북 콘서트도 도서관이나 작은 책방에서 매달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도 세월호를 기억하고 불러 주시는 곳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 북 콘서트에 함께하는 분들의 다정함에 동수 씨도 형숙 씨도 나도 힘이 난다. 

오늘은 서귀포 보목동에 있는 ‘북카페 가까이’에서 북 토크를 한다. 차는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이 폐차시키고 조용하다는 전기차를 60개월 할부로 샀다. 매달 나가는 할부금이 부담되지만 조용하고 기름값도 안 들고 새 차라 좋기는 좋다. 

서귀포로 가며 핸드폰을 차에 연결해 음악을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선경의 ‘다정한 시’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나직하게 나도 따라 부른다.

 

실망하고 구겨 버린 종이를 주워 너는
무슨 말인가 쓰고 지웠다가 또 쓰고
그렇게 내게로 돌아온 조금 더 낡아진 종이엔
내 빈 단어들 사이에 너의 단어가 더해져
가장 멋지진 않지만 하나의 시가 되었네
혼자서는 쓸 수 없는 무척 다정한 시

 

 

수상 소감

 

1회 ‘작은책 생활글 공모전’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2회 때는 꼭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故)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교육 철학과 전태일 열사의 노동자 정신을 이어온 작은책 생활글 공모전’이라는 문구가 마음을 흔들었거든요. 

제가 만화 예술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많은 영향을 받은 두 분의 이름이 들어간 공모전에 꼭 글을 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상도 받고 싶었어요. 왠지 이오덕 선생님과 전태일 열사가 주는 상인 거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혼자 그렇게 상상하며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다정한 시>(‘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작업 분투기)를 쓰면서 만화를 만들었던 과정을 돌아봤습니다. 그동안 피해 왔던 세월호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아픔의 시간이었고 이명이 생기면서부터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포기해도 될 만큼 힘들었어요. 세월호 파란 바지 의인 동수님을 비롯해 정말 많은 분들의 응원과 도움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화를 받는데 ‘작은책상을 받게 됐다’는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이명 속에서도 또렷이 들렸습니다. 어찌나 기쁜지 친구들에게 막 자랑을 했습니다. 공식 발표 전이라 SNS에는 올리지 못했는데 이제 올려서 동네방네 자랑을 해야겠어요.

“나 ‘고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교육 철학과 전태일 열사의 노동자 정신을 이어온 작은책 생활글 공모전’에서 최고상을 받았어!”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 이런 멋진 공모전을 만든 <작은책>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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