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읽기

가족이란 이름으로 힘들게 하지 말자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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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가족이란 이름으로 힘들게 하지 말자

최성희/ <작은책> 객원기자 

 


<작은책> 2022년 10월호에서 ‘아내의 장애인 판정’을 읽고 너무 슬펐다. 나는 시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 내가 결혼할 때, 시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 어머니 부담을 주지 않겠다.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가겠다.”

 

시어머니는 내 남편인 첫아들을 낳고 3개월 만에 산후우울증으로 정신병원과 집을 오가다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을 했고, 노년이 돼서 요양원에 갔다. 그렇게 어머니는 거의 50년을 집이 아닌 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오롯이 시아버지, 그리고 큰아들인 내 남편 몫이었다. 마지막까지 시어머니를 책임지신다 했던 시아버지는 4년 전,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 어머니와 함께 들어갔다. 남편이 명퇴를 하고 해외를 나가면서, 누나에게 요양원의 부모님을 부탁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누나에게는 금전적 부담을 일절 주지 않는 것으로 했다.

 

남편에게는 홀로 두 자식을 키우며 경제적으로 힘든 누나와 알코올의존증을 앓는 동생도 있다. 나는 마흔에 늦은 결혼을 하면서 결심한 것이 하나다.

‘남편에게 가족이란 이름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남편과 튀니지에 머물 때, 양양의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어머니가 많이 안 좋아. 1차 뇌수술은 잘 받았다고 했는데, 2차 출혈이 있어 또 수술을 받았어. 어머니는 내가 돌보는데, 아버지가 걱정이야. 형부는 두고 언니만 한국에 와서 한 달만 아버지를 돌보면 안 될까?”

나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3년 전, 친정 오빠가 암으로 소천했다. 그때, 부모님은 동생이 책임지고 나는 오빠를 책임지기로 했다. 나는 오빠를 마지막까지 책임졌고, 오빠의 어린 아이들과 한국말이 서툰 베트남 새언니를 책임졌다). 남편은 바로 비행기표를 구했다. 11월 말부터 이듬해 1월 31일까지 양양에서 친정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짧은 두 달,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결론은, 어머니는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셔서 주간 보호센터를 다니게 됐다. 나는 남편에게 가족이란 이름으로 힘들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 양양 부모님 집의 사진첩에는 남편이 지난 8년 동안 내 부모님에게 잘한 것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1월 31일, 양양에서 제주도로 떠났다. 우리는 다시 해외로 나가기로 하고, 3월 7일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2월 1일 시누이한테 전화가 왔다. 시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한다. 시누이와 의사가 나눈 통화 녹음을 남편과 같이 들었다. 요양원에서 시아버지는 아침에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왼쪽 뇌에 출혈이 크게 일어났는데, 수술하기에는 연세도 많고 예후도 안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중으로 사망할 수도 있으니 마지막 존엄하게 돌아가실 수 있게 중환자실로 모시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 시누이는 수술은 안 된다는 데에 동의하고 중환자실 옮기는 것도 전화로 동의했다. 

 

나는 절망했다. 일주일 전, 분명 시부모님 수술과 중환자실 입원은 신중하게 결정하자고 했다. 시누이가 당황해서 혼자 결정할까 봐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나는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요양원에서 근무도 했다. 말기암 오빠의 마지막 임종을 지켰고, 뇌출혈 어머니의 똥 기저귀를 갈았다. 중환자실에서 아버지의 고통과 앞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를 부담할 남편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아버지를 담당하는 신경외과 의사를 만났다.

“나는 며느리와 사위와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 임종에 대한 자식들의 죄책감을 알기에 인간으로 마지막 존엄하게 돌아가시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입니다. 지금 아버님은 뇌출혈로는 돌아가시지 않습니다. 패혈증이나 요로감염 등으로 돌아가실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선생님,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아버지가 고통이 없고,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임종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제 개인적 의견은 말할 수 없습니다.”

‘너의 가족이면,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잖아!!! 이 나쁜 놈아!!!’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고 삼켰다. 시아버지 중환자실 비용은 하루 만에 60만 원이 넘어갔고, 나와 남편은 병원 옆 낡은 모텔에 누웠다.

나와 시누이, 남편은 모두 의견이 다르다. 가족의 이름으로 이 어려움을 견뎌야 한다는 것만 같다. 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편에게 가족의 이름으로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내 입을 막는다. ‘나라면, 나라면 내 아버지를 이렇게 죽게 하지 않을 거야.’

 

의사가 오늘 중으로 사망하실 수 있다고 했을 때, 나는 가족들이 임종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시아버지는 원치 않는 요양원 생활 3년을 견뎠다. 중환자실에서 요도관, 위식도관 그리고 주삿바늘을 견디기 위해 손은 결박되어 있다. 무엇보다 평생 자신에게 적은 돈도 쓰기 아까워하신 분이, 자식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며 죽고 싶어 하지 않으실 거란 걸 나는 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자식이라는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다.

 

어떤 깨어 있는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1인실 가족 임종 병실을 운영하자고 주장했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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