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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열 선생님의 ‘약속 노트’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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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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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열 선생님의 ‘약속 노트’


권동희/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당신의 동료였던 선생님께서 ‘윤병열을 잊지 말자’면서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어요. 그 글을 보니, 저도 당신을 잊고 지낸 지 오래된 것 같아요. 사건을 한 지도 거의 10년이 지나가고 있군요. 세월이 그렇게 빨리 지났지만 제가 당신의 사건을 잊지 못하는 기억 속의 장면에서는 송치수 전교조 수석부지부장, 당신의 옆지기와 아이, 그리고 당신이 가르쳤던 명석고등학교 2학년 6반 아이들과의 ‘약속 노트’가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숭고한 희생은 잊을 수 없지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당신은 그 꿈을 위해 노력했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어요. 대학교 때부터 야학 교사를 하면서 청출어람이라는 교육 철학을 가졌고, 1999년도부터 한문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그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권리를 위해 노력하는 전교조 대전지부에서도 상근간부로 열심히 활동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2013년 3월 22일 당신이 급작스럽게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선생님들이 진심으로 슬퍼하셨고, 당신을 동생처럼 아끼셨던 송치수 당시 대전지부 수석부지부장은 저를 처음 만나 헤어질 때 “정말 너무 가슴 아프다, 꼭 산재가 되어야 한다”면서 제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셨어요.

 


네 차례 면담 조사를 했고, 일반고의 슬럼화 현상과 더불어 당신의 직무, 업무 환경, 스트레스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명석고등학교 선생님들도 적극적으로 조사와 자료 협조에 응해 주셨지요. 학교의 행정 업무, 담임 업무 및 결정 문제, 수업 내용과 상치 수업, 담당한 기획 업무, 방학 보충수업과 출퇴근 시간, 개강 이후 보충수업과 실질 초과근무 상황, 건강상태 등 세부 항목을 나누어서 하나씩 조사해 나갔어요. 

 

조사를 하면서 놀라웠던 건 당신이 담당 학생들 25명한테 약속 노트(매일 1.하루 계획, 2.학습 계획, 3.하루를 돌아보며)를 쓰게 하고 직접 이를 체크하며 빨간 펜으로 충고를 덧붙이는 등 아이들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어요. 정말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당신은 개학 첫날부터 쓰러진 날까지, 야간자율학습 시간까지 남아서 아이들을 돌보았고, 그런 당신을 기억하는 학생들 29명이 확인서를 써 주었어요. 산재를 신청하고 나서 대전 지역 수백 명의 선생님들이 당신의 죽음이 반드시 산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이하 사학연금공단)에 탄원서를 제출하였지요.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과로사 사건을 많이 한 편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사학연금공단의 산재 사건 경험이 많지 않았어요. 사학연금공단의 산재 인정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지금도 사립학교 교직원의 경우 공무원재해보상법을 준용할 뿐, 자체적인 산재 기준을 공표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승인되지 못할까 걱정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당신이 사랑했던 옆지기와 아이를 몇 차례 만나면서 그런 부담감이 컸었어요. 2013년만 하더라도 아이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있을 정도로 너무 어렸어요. 처음 만난 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빠는 겨우 73년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사건을 산재로 승인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교사들에 대한 산재 판결문 44건을 어렵게 입수해서 하나씩 분석해 나갔어요. 산재로 승인되지 못했던 사건이 훨씬 더 많았지만 법원에서 교사들의 특징, 특히 과로사와 관련된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공부했어요. 그리고 당신의 사건에 적용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2013년 10월에 유족보상금 청구서 등 관련 자료를 제출했고, 긴장 속에 2개월이 흘러갔어요. 다행히 2013년 11월 27일 개최된 급여심의회에서 당신의 사망이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직무상 사망이라고 인정되었지요. 그때 저도 그렇지만 당신의 배우자와 송치수 수석부지부장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어요. 제가 당신을 기억하는 건 무엇보다 숭고한 죽음이라는 것이었어요. 불과 마흔한 살의 나이에 평소 장기기증 의사에 따라 당신의 장기 아홉 개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했어요. 그렇게 당신은 세 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면서 숭고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어요. 

 

사건이 마무리되고, 저는 아이들과 고향을 내려가면서 당신의 배우자와 장인어른 그리고 아이를 다시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노무사님 고생하셨다면서 여름 내내 아버지 논에서 새를 쫓으며 길러 낸 쌀이라면서 저에게 선물로 주신 적이 있어요. 그 쌀을 선물하는 당신의 배우자를 보면서 ‘이제 견디며 그래도 잘 살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내려왔는데, 당신을 닮아서 정말 좋은 사람으로 잘 살고 있겠지요.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몇 달 뒤 2013년 5월 14일 <오마이뉴스>에 당신의 삶을 기억하는 기사가 있었어요. 그때 당신이 담당하던 아이 중 한 명이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면 ‘힘내’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어요. 방학 동안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오후 자습 시간이나 야간자율학습 시간까지 남아서 지도해 주셨어요. 특히 약속 노트를 매일 검사해 주시면서 조언을 꾸준히 써 주셨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장난을 하시면서 거리감이 전혀 없이 가깝게 지내셨어요. 그분은 우리들의 최고의 멘토셨어요. 선생님 죄송하고, 고맙고 사랑해요. 존경합니다.”라고 했어요. 저도 사건을 하면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 정말 많이 생각하고 느꼈어요. 윤병열 선생님, 당신의 숭고한 희생을 항상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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