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읽기

몸은 이유를 알고 있다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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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몸은 이유를 알고 있다

홍성주(달님)/ 변산공동체 식구

 


머리가 아니라 몸에 갇혀 있던 기억이 있다. 일고여덟 살 즈음, 어느 날 집 앞 넓은 공설운동장에 군복 입은 아저씨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나는 세 살 아래인 남동생과 운동장 구령대 밑 그늘에 앉아 군인 아저씨들을 구경했다. 그때 한 군인 아저씨가 우리 앞으로 달려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이쁘다. 더운 날 동생 손잡고 나왔구나. 우리 애기들 보니까 아저씨 집에 같이 지내던 조카들 생각이 나서 이거 주려고 가져왔어. 먹어.” 하며 사탕을 준다. 내가 망설이고 못 받으니까 아저씨가 직접 포장지를 벗겨서 “괜찮아! 먹어!” 하며 나랑 내 동생 입에 넣어 준다. 얼떨결에 사탕을 받아먹은 내 동생은 좋아한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저씨는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겁먹지 마!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야. 아저씨는 뜨거운 날도 추운 날도 나라를 지키고, 너희들을 지켜 주는 군인 아저씨야! 아저씨가 오늘 훈련이 힘드니까 조카 생각이 많이 났어. 그런데 너를 보니까 참 좋다. 너랑 잠시만 이야기해도 아저씨가 힘이 나서 나라 잘 지킬 거 같아. 잠깐 쉬는 시간 동안 아저씨랑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동생이 사탕 먹을 동안 잠시만 말이야.” 

아저씨는 내 동생에게 사탕을 한 개 더 까 주고는 “아가야! 여기서 사탕 먹으면서 잠시 기다려 줄래. 누나랑 안에서 잠깐만 이야기하고 나올게.”라고 했다.

내 동생은 좋아하는데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아저씨! 여기서 이야기하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왜냐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 저 군인 아저씨들이 보면 내가 놀고 있는 줄 알고 혼나거든. 아저씨 좀 도와줘!”

그 사람은 순식간에 내 손을 세게 잡아끌고 구령대 아래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안은 어둡고 냄새나고 무서웠다. 

“아저씨! 여기 무서워요. 나갈래요. 어둡고 냄새나고 무셔~읍~!” 

갑자기 그 사람이 어둠 속에서 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무섭게 변한 그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해! 여기 총 있다. 소리 지르면 총 쏜다.” 

 

난 너무 놀라서 목소리도 안 나오고 얼음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순식간에 그 사람은 내 옷을 모두 벗겨서 나를 눕혔다. 그 사람도 바지를 내리고 내 위로 올라왔다. 숨이 막혔다. 그 사람의 몸에 붙어 있는 크고 딱딱하고 뜨거운 뭔가가 내 몸에 닿았다. 나는 그게 총인 줄 알았다. 죽고 싶지 않아서 몸에 힘을 주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소용없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그냥 ‘아! 나는 이제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죽었다.’ 생각했다. 내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갔고,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의 몸도 힘이 빠진 거 같았다. 내 몸 위에 붙어 있던 크고 딱딱한 총이 사라졌다. 아니, 작고 부드러운 그 무언가로 변했다. 갑자기 그 사람이 일어나 바지를 입더니 울고 있는 내게도 옷을 입혀 주고 일으켜 앉혔다. 내 눈물을 한 번 닦아 주더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아저씨가 미쳤나 보다. 아저씨 용서하지 말고 미워해.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어둠에 눈이 적응했는지 울고 있는 그 사람이 보였다. 분명히 들어올 때는 군인 아저씨랑 들어왔는데 지금은 겁먹은 애기 같았다. 꼭 내 남동생처럼 보였다. 

나는 가끔 엄마 찾으며 앙앙 우는 내 남동생을 품에 안으며 “에구. 우리 애기! 엄마 찾는구나! 엄마 보고 싶었구나! 엄마한테 안기고 싶었구나! 그랬구나! 아~ 이쁘다. 우리 애기!” 하며 엄마처럼 달래 준다. 그럼 내 동생은 엄마에게 안겨 있는 것처럼 눈물을 멈추고 편안해졌다. 나는 그 사람이 울고 있는 내 남동생으로 보였다. 나는 내 동생에게 하듯 울고 있는 그 아저씨를 안아 주면서 똑같이 말해 주었다.

 

“에구. 우리 애기! 엄마 찾는구나! 엄마 보고 싶었구나! 엄마한테 안기고 싶었구나! 그랬구나! 우리 애기 잘못이 아니야! 아~ 이쁘다. 우리 애기!”

이 사람은 내 남동생이 아닌데 내 입에서는 내가 어찌 막을 새도 없이 이상한 말이 나와 버렸다. 그 사람도 흠칫 놀라는 듯싶더니 내 동생처럼 내 품 안에서 한참 울었다. 어느 순간 눈물을 그쳤다.

 

밖으로 나왔다. 어지러웠다. 그 사람은 군인 아저씨들 있는 곳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나는 여전히 사탕을 먹고 있는 내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 꿈을 꾼 것 같았다.

 

다음 날 성당 주일학교에 갔다. 나는 그 당시 부모님보다 더 좋아하는 주일학교 담임 강레지나 수녀님에게 내가 겪은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수녀님은 깜짝 놀라더니 눈물을 흘렸다.

“우리 베로니카! 우리 성주! 얼마나 놀랬니?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우리 베로니카 잘못이 아니야! 우리 성주 잘못이 아니야!”

수녀님은 오랫동안 껴안아 주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눈이 녹듯 그 기억이 녹아 버리고 따뜻해졌다.


그날의 일은 꿈처럼 구름처럼 사라져 버렸다. 살면서 머리는 아무 기억도 못 하고 지냈다. 그런데 내 몸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다시 그 기억이 선명하게 올라온 건 결혼하고 3년 후부터이다. 결혼 생활이 연애하듯 즐거웠던 3년 동안은 괜찮았다. 사랑이 식어 가던 어느 날!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남편이 내 몸을 건드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올라왔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몸이 그 폭력을 기억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 뒤로 그날의 성폭력 기억과 남편과의 성행위가 겹쳐서 분리가 안 돼 힘들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상담사는 내 몸이 화가 풀릴 때까지 그 새끼에게 욕을 실컷 해 주라 했다. 그것이 내 몸의 아픔을 알아주는 처방이라 했다. 욕을 찰지게 못하는 나에게 시원하게 욕하는 영상도 보여 주고 따라 하라며 욕을 가르쳐 줬다.

“씨발! 개새끼야! 개좆 같은 새끼야!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애가 얼마나 놀랐으면 아직도 몸이 경기하듯 놀래냐고! 이 나쁜 새끼야! 이 미친 새끼야! 이 사기꾼 새끼야!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몸에 힘이 들어가고 부들부들 떨릴 때마다 실컷 욕을 해 주니 차차 몸이 진정됐다. 그날 내 몸에 갇힌 기억들이 모두 떨어져 나왔다. 나는 그 기억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떨어뜨려 볼 수 있었다. 

 

몸은 솔직하다. 마음만 챙기고 몸을 안 봐 주면 티가 난다. 아직도 몸은 기억하고 아프다고 하는데 마음 혼자 괜찮다고 하는 것은 없는지 찾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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