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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출몰 백서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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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저 할아버지......’

  몇 주 전 이른 아침 서울을 가려고 5학년, 4학년 딸아이들과 함께 터미널로 갔을 때였다. 시골 작은 터미널엔 몇 사람만 띄엄띄엄 앉아있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서둘렀더니 생각보다 여유 있게 도착해서 우리도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보고야 말았다. 딸아이 건너 편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못된 짓을! 널널한 자리 놔두고 굳이 우리가 앉아있는 근처로 와있던 이유는 바로 변태짓 때문이었다.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못된 짓를 하고 있었다.

‘하........이 아침부터, 이 더위에...... 지겹다 지겨워......’

  주변을 둘러보니 아줌마 한분만 계실 뿐이었다. 그 아줌마도 저 변태 짓을 보고는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리셨다. 나는 일단 아이들을 데리고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밖으로 나왔다. 아침부터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오랜만의 여행으로 설레던 마음은 이미 짜증으로 변해버렸다.

  내 나이 사십대 중반, 그 동안 온갖 종류를 변태들을 만났봤다. 그 중에서 몇개만 추려보자면...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일 먼저 인지하게 된 변태는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날 아침이었지만 교회를 가려고 우산을 들고 가는 길이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거리는 물로 넘치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길모퉁이에 서있었다. 그 아저씨가 나를 보고 있었기에 나도 아저씨를 보았다. 바지 사이에서 손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게 무얼 의미 하는지 몰랐기에 그저 비 오는데 왜 저렇게 서있나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교회에 가보니 언니들이 변태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때부터 ‘변태’라는 단어가 각인되었다.

  초등학교 가는 길은 4차선을 끼고 있는 대로변으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었다. 드문드문 등굣길 아이들이 가고 있는 아침이었다. 내 앞으로 어떤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비켜 갈 요량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코트 앞자락을 활짝 펼쳐보였다. 나는 그저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내 뒤로도 등교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처럼 조용했다. 그 이후로 다른 길로 돌아서 학교를 갔다.

  중학교는 학교 담벼락 건너편이 주택가 골목길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청소를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아저씨가 나타나 아랫도리를 공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변태 아저씨는 대담하게도 학교 정문으로 와서는 길을 물어보곤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버스로 등하교를 했다. 중고등학교 네 군데가 몰려있는 지역이라 등하교 시간이 되면 버스는 언제나 콩나물시루였다. 그날도 만원버스에서 겨우 서있는데 엉덩이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누군가의 가방이 나를 찌르나 싶어서 슬쩍 뒤를 돌아보니 와이셔츠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나는 서 있는 자세를 바꿔 내 가방으로 엉덩이를 가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남자는 계속 내 엉덩이를 자신의 성기로 찌르고 있었다. 나는 지각을 각오하고 그냥 버스에서 내렸다. 여고라면 어느 학교나 있는 교문 앞 변태는 우리 학교에도 거의 일상으로 출몰했다. 교문기둥 뒤에 딱 붙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다가 무조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게다가 쉬는 시간, 점심시간, 자율학습시간 가리지 않고 교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자락에서 언제나 나타났다. 우리가 꺅~! 소리를 질러도 변태는 도망가거나 숨거나 하지 않고 당당히 서 있었다.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잡으로 가기도 하고 경찰차가 오기도 했지만 그때 잠깐일 뿐, 졸업할 때까지도 그 변태는 건재했다.

  20대 때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건너편 승강장에서 고급진 갈색 무스탕을 입은 젊은 남자가 변태짓을 시작했다. 그때 승강장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 여자만 3명 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공개적이고 사람 많이 다니는 곳에서 설마 했지만 그 변태는 당당히 못된 짓을 이어갔다. 나는 내 발끝만 보며 어서 빨리 지하철이 도착하기만을 고대했다. 육교를 지나가는 어느 저녁에는 할아버지 같은 아저씨가 내 가슴을 치고 유유히 지나갔고 알바를 가는 아침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 주차한 자신의 차 안에서 포르노 잡지를 보이며 못된 짓을 하는 변태를 만나기도 했다.

  후미진 골목길이든 대로변이든, 저녁이든 아침이든, 지하철이든 버스든 걸어 다니든 변태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양하게 나타났다. 당당하게 태연하게 나이가 젊든 많든 변태들은 못된 짓을 하고 있었다. 변태를 만나는 것은 몇 만분의 일 정도로 극소수의 확률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번번이 ‘에이, 재수 없어’하며 소금을 팍팍 뿌리는 심정으로 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이제는 좀 달라져야겠다. 지긋지긋한 변태들이 끊임없이 활개 치는 것은 그동안 숨죽여 피해왔던 일상들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하지? 소리를 지르고 호루라기를 불고 112로 신고하고 폰 카메라로 찍어? 그런데 과연 이런 대처들이 가능할까? 변태들의 놀라운 출몰 속도보다 그 순간 당황한 내 손이 더 빠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수년간의 변태 전문가인 그들의 못된 짓들에 내 저항이 쉽지 않겠지만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일단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어디 변태 퇴치 대응 훈련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고 싶다. 아예 유치원에서부터 재난 대피 모의 훈련을 하듯 변태 퇴치 훈련을 꾸준히 하면 좋겠다. 막상 예기치 않게 변태를 만나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머릿속 이론들이 제대로 행동으로 나오지 않아서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변태 퇴치 대응도 연습이 필요하다.

  • 작은책 여성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마주쳐야했던 변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작은책에 실리게 되면 이메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2018-08-31 16:57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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