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마당

독자 투고

오빠 미안해. 너무 미안해.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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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오빠는 전쟁을 같이 겪고 살아남은 전우 같은 존재다. 요즘 아동발달 책에는 부모님이 싸우는 경우, 아이들은 전쟁 중 폭격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심리적 불안을 겪는다고 나온다. 부모님은 정말 쉬지 않고 오랫동안 싸웠다. 아버지는 3살 때, 어머니가 죽고 새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고 자랐다. 그래서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식을 목숨보다 귀하게 생각했지만, 어머니와 관계에서 너무 힘들어 했다. 자는 아이들을 일부러 깨워 우리들에게 아내를 비난하는 말을 많이 했다. 굳이 깨우지 날, 싸우는 소리에 일어난 어린 오빠가 벽에 머리를 기대어 멍하게 울고 있다. 동생은 울다 내 무릎을 베고 잠들고, 나는 오빠를 보면서 울고 있다. 내가 내 모습을 보지 못하니 오빠가 바로 나였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남았다.

오빠는 작고, 외롭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런 오빠에게 유일한 취미가 있었는데, 우표수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과제로 오빠 우표 집을 가져갔다. 오빠에게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교실 뒤에 진열된 우표 집을 종업식에 꼭 가져오기로 해놓고, 까먹고 집에 왔다. 다시 학교에 가니 진열된 다른 아이들 것은 그대로 있고, 오빠의 우표 집만 없었다.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시는 우표를 수집하지 않았다. 차라리 오빠에게 야단맞고 매라고 맞았으면 좋았겠다.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난 이 시간으로 가고 싶다.

내가 중학생일 때, 오빠가 한 번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부끄럽지?”

무슨 소리야? 내가 오빠를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오빠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는 네 친구가 집에 와도 나를 소개하지 않아. 너는 친구들에게 나를 보여주지 않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오빠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오빠가 작고 못생긴데다가 공부 못하고, 바보 같아서 부끄럽게 생각했던 거다. 내 친구들은 내가 장녀인 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동생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공부도 잘하니까 모두 알았다. 뒤늦게 오빠의 존재를 알고, 내게 오빠가 있었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그랬다. 나도 내 마음을 오빠가 말하기 전까지 몰랐다.

고등학교 시절 오빠는 소풍가는 날, 김밥 도시락을 제외하면, 김치반찬 도시락만을 가지고 다녔다. 전쟁 후, 9살 소녀가장에서 서른까지 처녀가장으로 공장생활을 했던 나와 오빠의 어머니, 결혼 후 66녀의 맏며느리가 된 그 고단한 어머니의 삶을 지금은 이해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무심함과 냉정함은 오빠에게도 나에게도 상처였다.

그나마 나는 불만을 이야기하고 등짝을 맞더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하는데, 오빠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모두 오빠가 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빠 마음속에는 분노가 커가고 있었다. 부모님에 대한, 가난에 대한 그리고 우리 여동생에 대한 화를 속으로만 참고 있었던 거다.

오빠 고등학교 1학년, 집에 귀여운 강아지가 왔다. 나는 7살 때, 개를 피해 도망치다 넘어져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는 크건 작건 다 무서워하고 싫어했다. 이 강아지는 정말 작고 귀여워 키워 볼 생각을 했다. 밤에 거실 상자 속에 혼자 있던 강아지가 무서워 버둥거리고 낑낑거렸다. 오빠가 개를 안고 같이 잤다. 나는 당시 사람이 개를 안고 잔다는 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보신탕을 좋아하는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개를 치워버려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목소리 큰 나로 인해 강아지는 하루 만에 원 주인에게 돌려줬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고등학생 오빠를 본다.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시팔 글 쓰는데 눈물이 난다.

오빠는 고등학교부터 오랫동안 혼자 성당에 다녔다. 그 후 10, 부모님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고, 부모님보다 늦게 세례를 받은 우리 자매는 모두 부모님의 축복을 받았다. 오빠는 자라는 환경에서 가족의 축복과 지지를 받은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오빠에게 유독 냉정하게 대했는데 나중에 그게 오빠에 대한 아버지의 잘못된 편애였음을 알았다. 우리 자매는 결혼하면, 남의 집 자식이 된다고 생각하신, 아버지에게 유일한 자식은 사실 오빠였다. 그런데 하나 뿐인 아들이 본인 성에 차지 않으니, 오빠를 참 많이도 힘들게 했다.

오빠는 공고를 다녔고, 3 취업 실습생으로 한전에 들어갔다. 전신주에 올라가는 일을 하러 부산을 떠났다. 학교선생님과 부모님이 모두 반대했는데, 오빠는 떠났다. 오빠는 집을 떠나고 싶었던 거다. 그 작고 힘없는 더불어 사회성 떨어지는 오빠가 실습을 나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나는 상상이 됐다. 그래서 2달 만에 집에 돌아 온 오빠가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그 심정도 이해됐다. 하지만 나는 우리 가정 형편에 오빠가 대학에 가면, 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한 마음에, 오빠 공부를 도와주지 않았다. 공부가 쉽지 않았던 오빠는 대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갔다. 나는 오빠에게 미안했지만, 안심하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오빠는 중간에 공장을 바꾸는 경우는 있어도 쉬지 않고 일했다. 나는 오빠가 공장에서 손가락을 다친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머리를 크게 다쳐 죽을 뻔한 사건은 이번 병원에서 들었다. 오빠가 라인을 청소하고 나오다, 누군가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큰 나사에 그냥 머리를 박았다고 한다. 옆에 직원이 소리를 치며, 수건으로 오빠 머리를 감싸고, 오빠는 기절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쳤는데도 오빠는 산재처리가 안되고, 공상처리도 겨우 받았단다. 공상처리하니 나도 오빠 입원했던 사고가 생각났다. 우리 가족은 오빠가 손만 조금 다친 걸로 입원한 줄 알았다. 사실은 손보다 머리 다친 것이 더 큰 문제였는데 아무도 몰랐다.

오빠가 서른에 결혼을 하겠다고 여자 분을 데리고 왔다. 당시 어머니는 지인 보증을 잘못 쓰고 그 지인이 급하게 처분한 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수중에 돈이 없었다. 새언니 될 분은 결혼하고 분가를 하고 싶어 했다. 그 아파트가 방 3개에 화장실이 2개가 있었다. 나는 결혼해서 부모님과 같이 살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물론 거긴 나도 포함해서 사는 거다. 당시 나도 결혼을 약속하고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새언니 될 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결국 파혼. 오빠가 그 분과 결혼했다면, 그 후 카드빚 사건과 주식 그리고 보험사건이 모두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오빠가 서른까지 가족들에게 착하고 조용한 바보 아들이었다면, 그 후 10년은 온 가족을 불안하고 걱정하게 만드는 이기적이고 나쁜 아들이었다. 그건 부모님과 내가 만든 거였다. 오빠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한 생각을 한다. 오빠에게 진정한 가족은 베트남 새언니와 두 아이들인 것 같다. 오빠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을 찾으면, 죽기 10년까지 결혼생활이겠지. 결혼을 해서 생일을 챙기게 된 오빠. 오빠와 새언니는 금술이 정말 좋았다.

한 번은 정말 궁금해서 오빠에게 물었다.

나는 새언니랑 정말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 오빤 어떻게 언니와 대화를 하는 거야?”

성희야, 네 언니와 나는 말이야. 그냥 눈빛으로도 대화가 된다. 말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아. 우린 단어 몇 개로도 다 알아. 그냥 안다.”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오빠를 보고 살지 않을 결심을 했었다. 내게 오빠는 남에게 꺼내놓기 그냥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나란 인간이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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