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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이름, 박선욱 간호사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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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작은책 산재 상담소


잊지 말아야 할 이름, 박선욱 간호사

 

권동희/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

 


2018년 2월 15일, 당신이 9층 아파트 난간에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그날부터 오늘 10월 4일까지 1693일이 지났군요. 2019년 2월 16일 당신의 1주기 추모 집회가 청계천에서 열렸을 때,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연단에 서서 이렇게 말했어요.

 

“마지막으로 오늘은 고 박선욱 간호사님의 1주기 집회이자 제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고인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사건을 준비하면서 고인이 카톡에 남긴 말 중에 잊지 못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두렵다. 너무 심장이 미친 듯하다”. 저는 이 말에서, 프리셉터(선배 간호사)에게 혼나면서 견뎌 보려 했고, 매일 3시간밖에 잠을 못 자면서 버텨 보려고, 하루하루 전쟁터보다 더한 중환자실에 출근했던 고인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2월 15일 오전 9층 난간에서 투신하기 전 고인이 느꼈을 그 초조함과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45년 전 저희 아버지는 강원도 태백에서 탄광이 무너지는 산재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철이 조금 들어 매년 기일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탄광이 무너질 때 그 몇 분 몇 초간 당신이 느꼈을 초조함과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기억과 행동은 중요한 연대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 박선욱을, 고 서지윤을 기억하는 이 자리에 모인 것은 고인에 대한 가장 소중한 연대의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당신의 사건을 맡기가 매우 두려웠어요. 왜냐하면 오래전 저는 간호사 자살 소송사건을 맡아서 진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사건은 지방의 작은 병원 간호사가 자신의 몸에 염화칼륨을 투여하여 사망해서, 가족들이 산재를 신청했지만 불승인되었어요. 2007년 법률원에 있을 때 이 사건 소송 실무를 맡아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패소했어요(서울행정법원 2008. 4. 24. 선고 2007구합21785 판결). 진료기록 감정에서도 고인에게 우울증과 일부 업무 스트레스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지만 당시 법원의 벽은 너무 높았어요.

 

그때 간호사의 업무가 무엇이고 어떤 스트레스가 있는지, 특히 간호사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여러 논문들을 많이 봤는데, 간호사의 이직과 소진, 직무 스트레스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아 왔어요. 결국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부딪쳐 보았지만 제 능력 부족으로 이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당신의 사건을 선뜻 맡기가 두려웠어요. 

“과연 이길 수 있을까. 5개월여 만에 내과계 중환자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프리셉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제대로 된 업무 교육이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을까. 하루에 서너 시간의 잠과 매번 거르게 되는 끼니라는 당신의 유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2월 13일 배액관 사고 당시 의사의 질책은 얼마나 심했을까. 아파트에 올라가서 1시간 가까이 의료소송에 대해 36회를 검색했던 마음은 어땠을까….” 수많은 질문을 가지고 사건에 착수했어요. 

 

고 박선욱 간호사가 자신의 휴대폰에 남긴 기록. 사진_ 권동희

 

 

사실 당신도 알다시피 제가 열심히 한 것보다, 많은 분들이 이 사건을 위해 함께 노력해 주었어요. 그런 노력과 사회적 압박 때문인지 지금까지 자살 산재 사건을 했을 때 볼 수 없었던 경찰의 조사 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어요.

무려 46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이었어요. 그 내용을 다시 분석했고, 당신이 일했던 그 5개월여 기간을 일별로 다시 분석해서 얼마나 일하고 잤는지, 병원과 도서관을 얼마나 자주 왔다 갔다 했는지 살펴보았어요. 지인들과의 카톡 내역도 정리하고, 대학 동창들의 진술과 문자메시지도 보았어요. 여러 자료와 증언을 통해 당신이 정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5개월여 그 힘든 고통의 시간, 그런 밝고 명랑한 당신이 환자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으로 버티려고 했던 고귀한 노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서 환자들을 위한 간호사로서, 한 노동자로서 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쏟았던 소중했던 시간이라는 점도 말이에요. 그러나 아산병원과 프리셉터는 당신에 대한 교육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3명의 중환자를 담당하게 했었지요. 애초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밀어 넣었지요.

 

 

2018년 3월 아산병원 성내천 육교 난간에 故 박선욱 간호사 추모 문구가 적힌 종이들이 붙어 있다. 사진 제공_ 故 박선욱 공대위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판정위원회에서 눈물을 보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선욱이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습니다. 아주대 간호학과에서 친구들과 교수님들께 모두 칭찬받는 학생이었고 훌륭한 간호사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아산병원에 입사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 아이의 죽음 앞에 병원은 아이 탓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죽음은 ‘업무로 인해서’라고 저는 감히 단언합니다.” 다행히 근로복지공단에서 당신의 죽음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었고, 서울판정위원회는 “간호사 교육의 구조적인 문제로 직장 내에서 적절한 개편이나 지원 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자기 학습 과정에서 일상적인 업무 내용을 초과하는 과중한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판단했지요(2018판정 제2840호, 2019. 3. 6.).

 

코로나로 온 국민이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당신과 같이 묵묵히 환자들을 위해 고군분투해 주신 이 땅의 많은 간호사 노동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오늘 당신을 다시 기억하려 합니다. 기억과 행동은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연대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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